[특별기획] 기사 제목에 ‘흑인’ 쓰면 안되나?

차별피해 등으로 인종 명시해야 할 이유 없으면 피해야

범죄 가해자 등에 ‘프레임’ 씌울 우려 있으면 절대 금물

“흑인이 한인여성 때렸다” 등도 약자 간 대결구도 조장

한인 카톡방 캡처

 

지난 4일 애틀랜타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카톡방에 올라온 한 지역 한인언론사의 기사가 논란이 됐다.

기사의 제목은 ‘”96kg인 날 쑥 꺼내줬다” 30명 구한 흑인 영웅 정체 밝혀졌다’로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에서 생명을 구한 주한미군 장병들의 미담을 담은 것이다. 원래 이 기사는 한국 통신사인 연합뉴스가 30명 구한 3명의 영웅 찾았다…경기도 근무 미군들'(기사 링크)이라는 제목으로 전송한 것인데 한국 중앙일보가 굳이 ‘흑인’이라고 제목만 바꿔서 게재한 것이다.

이 제목을 미주 중앙일보가 받아서 썼고, 지역 한인 언론사도 그대로 인터넷에 올린 것이다. 언뜻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제목이지만 카톡방의 한 한인이 “한국 언론에서도 흑인을 강조해서 안좋아 보였는데 미국 지역 언론이라면 흑인이라는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의 반론을 제기했다.

◇ 인종 꼭 표기해야 할 필요없으면 피해야

그렇다면 한인 언론의 기사 제목에 ‘흑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면 안되는 것일까? 미국의 한인 언론사들이 이같은 인종 표기에 대한 지침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제시할 수 없겠지만 미국 언론의 예를 참고하면 정리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보가 콘텐츠 제공업체인 한국 연합뉴스의 기사를 전재하면서 늘 하던 고민이기도 했다.

우선 뉴욕타임스나 CNN, AJC 등 미국 언론을 살펴보면 기사에 흑인(Black)이나 아시아계(Asian) 등의 인종을 표기하는 경우는 인종이 ‘반드시 드러나야 할 때’ 뿐이다. 체포과정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인종차별이나 갈등이 문제가 될 때는 당연히 인종을 표기해야 한다.

또한 ‘한국계 여성, NFL 첫 흑인여성 사장 이정표’, ‘미국 해병대 사상 첫 흑인 4성장군 탄생’처럼 소수계가 이룬 성취가 역사적인 가치가 있을 경우 미국 언론들도 인종을 표기한다. 또한 ‘바이든, 철옹성 흑인 지지마저 주춤’이나 ‘흑인 스몰비즈니스가 코로나 피해 가장 크다’처럼 인종별 통계차이를 소개하는 기사도 인종 표기를 해야 한다.

◇ 범죄 용의자 등에 ‘프레임’ 씌우면 언론사 ‘흔들’

지난 2020년 1월 뉴욕의 지하철 역에서 한 남성이 연약한 여성을 철로에 밀어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 언론들은 빠짐없이 ‘흑인 남성이 밀었다, 뉴욕 지하철서 아시아계 여성 사망’ 등의 제목을 달며 인종을 정확하게 명시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들이 인용한 뉴욕타임스 기사의 제목은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여성 떠밀려 사망’이었고 용의자의 사진만 나왔을 뿐 기사에도 흑인이라는 표현은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용의자가 정신병력과 강도 전과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내용만 포함돼 있었다. 용의자가 중미 국가인 아이티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려졌다.

미국 언론들은 이처럼 범죄 용의자나 문제가 있는 인물을 묘사하면서 인종을 표기하는 것을 철저히 삼가고 있다. 독자의 ‘알 권리’를 빌미로 ‘너무 많은 정보(TMI)’를 주다가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인종적 차이에서 찾게 하는 오류를 일으키고 특정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인종을 표기해서 ‘프레임’을 씌울 우려가 있으면 이를 절대 금지하는 것이다.

흑인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유력지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는 조지 플로이드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2020년 6월 시위대의 구호인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fe Matters)’를 빗대 ‘건물도 소중하다(Buildings Matter, Too)’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언론사의 입지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폭력 시위로 인해 건물이 파괴되면서 입주자와 상인들도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은 기사였지만 잘못된 제목을 선택한 편집장은 곧바로 해임됐다.

◇ ‘흑인이 한인 공격’ 등 소수계간 갈등 조장도 피해야

위에서 소개한 지하철역 사건의 기사 제목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소수 인종간 갈등을 부추기는 악영향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계 사이에도 인종 혐오범죄가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사회구조에 대한 지적 대신 ‘약자 대 약자’ 대결구도로 몰아가면 소속 인종끼리 서로를 비난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에 지역 한인언론사가 사용한 제목인 ‘흑인 영웅’은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우선 필요없는 인종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 가장 큰 지적사항이다. 미군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굳이 흑인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아마 연합뉴스 기사 제목에는 없던 ’96kg인 날 쑥 꺼내줬다’는 표현을 넣으면서 ‘흑인=힘이 센 사람’이라는 한국식 스테레오타입을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또한 흑인을 미국인에 포함시키기에는 뭔가 어색하다고 느끼는 잠재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주로 ‘미국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백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머물지 말고 미국인으로 살고, 미국사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할 때도 백인과 백인사회를 지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해당 한인 언론사는 이러한 지적에 대해 “흑인을 굳이 강조한 것은 아니지만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가 하나라도 더 드러나는 것이 필요한 뉴스라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성별과 연령, 주한미군 등의 정보는 전달하지 않고 흑인만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더구나 이러한 지적 이후 아무런 설명 없이 해당 온라인 기사의 제목을 ‘흑인 영웅’에서 ‘외국인 영웅’으로 바뀠는데 이 마저도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는 맞지 않는데다 흑인을 미국인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대응이었다.

한편 본보를 비롯한 한인 언론들은 대부분 범죄 가해자가 한인일 경우 ‘한인 남성, 아내 납치해 살해 시도’ 등 한인임을 명시해 제목을 달고 있다. 이는 인종적인 편견을 유도하거나 프레임을 씌우려는 의도는 아니며 오히려 한인 독자들을 위해 반드시 명시해야 할 내용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건과 이슈 가운데 기사 가치의 경중을 가릴 때 한인과 밀접한 내용이 가장 가치가 높으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 한인 언론사 유일한 홍보 창구는 지역 카톡방?

이번 기사 논란이 부각된 것은 지역 한인 언론사들이 한인사회의 카특방을 가장 중요한 홍보 창구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2019년 애틀랜타 K 창간 이후 최근 한인 인터넷 매체가 경쟁적으로 등장했고 “광고효과가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종이신문들도 온라인 뉴스에 사활을 걸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해당 카톡방 이용자들은 “지역 언론사의 기사가 너무 많이 올라와 도배가 되다시피 한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로컬 기사도 아닌 연합뉴스 등 한국발 기사를 자기 기사처럼 포장해 애틀랜타 한인들에게 전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크다. 실제 해당 언론사의 기사 제목을 지적한 한인은 “이런 내용은 (한국 포털) 네이버에도 깔렸는데 굳이 이곳에 올리는 것이 맞는지 생각하게 하네요”라고 쓴 소리를 했다.

이에 대해 이 언론사는 “애틀랜타와 동남부 한인들도 관심을 많이 보인 소식이라 소개했다”면서 “이용자들이 불편해 한다면 앞으로 카톡방에 뉴스 게시를 중단하겠다”고 답했다. 본보는 자체 제작한 로컬 뉴스만 골라서 1주일에 3~4차례 해당 카톡방에 소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애틀랜타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정보 위주로 엄선해 게시할 계획이다.

이상연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