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자는 아무나 하나”

임철순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는 기자가 취재해 써낸 글을 선배나 데스크가 검토하고 다듬어 승인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칩니다. 데스킹이라고 부르는 이 과정을 통해서 기자들은 취재를 하는 법, 기사를 쓰는 법, 나아가 세상을 보는 눈을 익히고 배우게 됩니다. 그 일에 능숙하고 후배들을 잘 이끄는 데스크는 회사 선배일 뿐만 아니라 배우고 따를 만한 인생 선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온라인시대가 아니라 육필로 기사를 써서 넘기던 시절에는 단순 스트레이트가 아닌 기명기사, 박스기사 한번 나가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1면이든 사회면이든 기자 이름이 명기된 기사가 톱으로 나가면 ‘출판기념회’를 해준다며 선배와 동료들이 데리고 나가 술을 사주기도 할 정도였지요. 기사를 넘긴 다음 데스크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 앉아 온갖 까다로운 질문과 확인을 거치는 것을 ‘재판받는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만큼 데스킹 과정은 엄정했고, 몇 단계를 거치는 동안 기자가 쓴 초고는 토씨만 남을 정도로 완전 개작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기사를 넘긴 뒤 데스크가 글을 검토하는 동안 회사 외부에서 다른 일을 보는 요즘 기자들은 상상도, 이해도 하기 어려운 풍경일 것입니다.

나는 1990년에 미국 뉴욕의 ‘타임’ 본사를 견학하러 갔을 때 기사 하나를 58회나 수정한 사례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간지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주간지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확인과 검토과정을 거친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괴팍하고 실력 없는 데스크를 만나면 글을 엉뚱하게 개작하거나 기사의 값어치를 제대로 매기지 못하는 바람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너 이걸 취재라고 했니?”, “이것도 기사냐?”, “네가 기자냐?”라고 모욕을 하거나 심지어 폭력으로 군기를 잡으려 하던 선배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전국 모든 지역에 교환원 없이 전화를 연결해주는 장거리 직통전화시스템이 완성됐습니다. 이걸 DDD(Direct Distance Dialing)라고 불렀는데, 기자들은 이 말을 따서 마음에 들지 않는 데스크나 선배를 DDD라고 불렀습니다. ‘데스크 대가리 돌대가리’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투거나 시비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후배들은 선배의 데스킹을 거치면서 기자가 돼갑니다. 제대로 된 기자, 제대로 취재원을 만나 제대로 질문하고 제대로 기사를 쓰는 기자,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배에게 제대로 항의하는 기자는 엄격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데스킹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배라도 무슨 사심이 있거나 꼼수를 부려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으며 방법이 잘못돼서 그렇지 후배를 가르치는 역할 자체를 망각하거나 포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언론계에서는 선배들을 통한 교육과 훈련, 특히 보도과정의 데스킹을 통한 ‘기자 만들기’가 유명무실해진 것 같습니다. 아니 선배들이 후배에게 기사를 다시 쓰라고 하거나 취재방향을 바꾸라는 지시와 코치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눈치를 보는 경향이 높아졌습니다.

한 언론사 편집국을 책임진 간부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신입 기자에게 “이 새끼야!”라고 했다가 ‘직장 내 괴롭힘’에 걸려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회사의 한 간부는 명예훼손 위험이 큰 기사를 써온 기자에게 보충 취재와 추가 확인을 지시했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어 기사를 내지 않고 보류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 기자는 데스크가 멋대로 기사를 깔아뭉갰다, 갑질을 한다는 취지로 언론단체에 고발해 그 단체의 기관지에 기사로 보도됐습니다. 그 기자는 회사의 징계를 받고 퇴사했지만, 징계위원회에 변호사를 여러 명 대동하고 나왔다더군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정말 놀랐습니다. 선배의 훈육과 잔소리가 단순히 ‘직장 내 괴롭힘’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세상이 달라진 거지요.

일을 안 하거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을질’이나 하는 사람은 어느 직장에나 있지만, 언론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기사는 잘 쓰지 못하고, 말이 많고, 대외적으로는 정의와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수난과 피해를 당한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곤 합니다. 그러면 내용을 잘 모르는 외부 단체가 그를 편들고 나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매체를 중심으로 언론사가 많이 늘어나면서 기자의 수도 폭증했습니다. 지금은 웬만하면 다 기자를 자처합니다. 어떻게든 쓰기만 하면 기사이며 썼다 하면 다 보도가 돼야 하는 걸로 아는 기자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쓰고 자기가 데스킹을 한 기사,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기사, 남의 걸 베낀 기사가 둥둥 떠다닙니다. 기사를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기사가 나가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과거와 같은 폭력적이고 비인권적인 데스킹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시대이지만, 엄격하고 충실한 교육과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구 쓰는 기자,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 기자, 말이 되게 글을 쓰지 못하는 기자, 사실인지 의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쓰는 기자, 보도자료만 베끼는 기자, 이런 기자들이 내가 생각하는 ‘기레기’입니다. 후배가 선배에게 대드는 것은 조직의 긴장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배우고 다듬어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내후년이면 언론계 50년을 맞는 늙고 낡은 기자의 생각입니다.

<데일리임팩트 주필· 전 한국일보 주필, 편집국장(한국일보 견습 29기)/근저:”한국의 맹자 언론가 이율곡”, “손들지 않는 기자들”,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노래도 늙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