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넌 음모론] ③결국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가면 쓴 큐어넌 음모론에 한인 사회도 ‘들썩’

“어린이들을 구해야 한다” 여성들도 현혹돼

지난해 8월 12일 오전 9시20분경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30세의 여성 세실리아 풀브라이트가 자신의 차량을 이용해 19세 여대생의 미니밴을 일부러 들이받아 강제 정차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풀브라이트는 이 사고를 내기 직전에는 어머니와 어린 딸이 타고 있는 다른 차량을 추격하기도 했다.

범행 이유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풀브라이트는 “아동 성애자가 어린이를 납치하고 있어 이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펼쳤다. 이른 아침부터 술에 취해있던 풀브라이트는 조사 결과 ‘큐어넌’에 심취해 아동 성애자들을 찾아 처단하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세실리아 풀브라이트/Daily Mail

 

큐어넌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네오나치즘, 파시즘, 안티페미니즘 등 인종 우월주의와 남성 위주의 세계관을 가진 대안 우파(alt-right) 이론이다. 하지만 여성지 엘르(Elle)는 특집 기사를 통해 “여성을 배제하는 다른 우파 음모론과는 달리 큐어넌에는 여성 열성 당원이 너무나 많다”고 지적했다.

◇ 딥스테이트는 아동 성애자들…”SAVE THE CHILDREN”

엘르에 따르면 ‘피자게이트’로 상징되는 큐어넌의 아동 성착취자 음모론은 여성들에게 독특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만악의 근원’인 딥스테이트는 아동 성애자들로 이뤄져 있으며 이들로부터 착취당하는 어린이들을 구출하는 것이 큐어넌 커뮤니티의 임무라는 것이다.

다소 황당한 주장이지만 어린 자녀들의 보호에 민감한 교외 지역의 여성들에게 이러한 호소는 설득력을 갖게 됐고, 실제 미국의 어린이 성범죄가 계속 증가하면서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속삭임에 넘어간 엄마들이 하나둘 늘어나게 됐다.

그래서 등장한 소셜미디어 해시태그가 바로 ‘어린이를 구하라(#Savethechlldren)’이며 트위터에서 이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대부분 큐어넌과 연결이 된다.

큐어넌 운동의 전면에 나선 여성들은 대부분 ‘강인한 어머니’를 표방하는 편이며 총기를 능숙하게 다루고 각종 시위에서도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지난 6일 의회 난입 사건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큐어넌 신봉자 애쉴리 바빗은 공군 출신의 베테랑으로 의장실 점거를 위해 맨 앞에 섰다가 변을 당했다.

정계 진출도 여성이 더 활발해서 지난 11월 선거에서 연방의회에 진출한 큐어넌 조직원 2명이 모두 여성이다. 그 중의 한명인 매저리 테일러 그린(조지아, 공화) 의원은 유튜브 등을 통해 큐어넌의 이론을 지지자들에게 간략하고 호소력있게 전달해 선거 출마전부터 주목받았던 인물이다.

큐어넌 신봉자로 연방의회에 입성한 조지아주의 매저리 테일러 그린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인종의 벽은 그래도 높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큐어넌은 여전히 남성 위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악에서 구할 구세주는 남성인 트럼프이고 악의 축인 비밀결사(cabal)에서는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먼저 거론된다. 큐어넌의 남성중심적 사고는 안티페미니즘과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남성 위주의 세계관 보다 더욱 강력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조는 역시 백인우월주의다. 큐어넌의 단편적 계시를 뜻하는 Q drop(Q가 흘린 것) 또는 breadcrumbs(빵조각)를 살펴보면 외견상 인종의 구별은 없어 보이지만 ‘백인 구세주’를 중심으로 한 전체적인 이론은 네오나치즘 등의 인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의회 난입사건에 앞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한 조지아주 세차장 업주 클리블랜드 메레디스는 열렬한 큐어넌 신봉자이다. 그는 큐어넌이 본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기 전인 지난 2018년 이미 도로에 대형 ‘QAnon’ 광고 빌보드를 세워 화제가 됐다.

메레디스는 지난해 열린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시위에 반대하기 위해 현장에 공격용 자동소총을 들고 나타나 경찰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메레디스는 “결국 (딥스테이트를 제거하기 위한 과정은) 인종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큐어넌은 어찌 보면 미국사회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인종적 기득권이 인구 지형의 변화와 가치관의 전환으로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이에 반발한 백인들이 그려낸 이상적 사회를 위한 ‘묵시록’일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선택된 인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프는 이를 구현이라도 하려는 듯 이민을 축소하고 사회의 다양성을 막는 정책을 쉴새없이 몰아부쳤다.

◇ 코로나보다 빠른 변이…알면서도 속는다

백인 위주의 음모론인데도 한인 중에서 이를 믿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우선 소셜미디어 이용에 민첩한 한국인의 특성과 기독교적인 배경, 큐어넌 자체가 지닌 변화무쌍한 변신 능력이 주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폭발적으로 늘어난 소셜미디어 이용으로 음모론에 노출되는 한인들이 많아졌고, 미국내 아시아계 가운데 가장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 것이 큐어넌이 침투하게 된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미주 한인 가운데 60%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다.

물론 필리핀계의 기독교인 비율이 90%로 가장 높았지만 필리핀의 국교가 천주교인 점을 감안하면 큐어넌과 연관이 있는 개신교도 비율은 한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큐어넌 음모론이 지니고 있는 이론적 확장성과 변이 능력도 우파 성향의 한인들에게 큐어넌을 심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큐어넌이 중국에 대한 적개심과 한국 집권여당 및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 등과 결합했고 한국 4.15 총선 선거사기에 대한 의혹이 미국 선거에까지 이입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큐어넌에 영향을 받는 한인들이 늘어났다는 분석이다.

4편에 계속

지난해 11월 2일 뉴욕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큐어넌 신봉자 [로이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