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공화국]②스타 마케팅에 청소년도 ‘명품 홀릭’

명품 소비 이유에 “연예인 사용해서”…미디어 파급력 ‘막강’

“아시아 2030 잡자”…’한류스타’ 마케팅에 청소년까지 ‘흔들’

대한민국은 ‘명품 공화국’이다. 직장인들은 월급을 모아 로렉스를 플렉스하고 생활비를 아껴 샤넬백을 산다. 이른 새벽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시로 오르는 몸값에도 명품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과분한 명품 사랑에도 한국 소비자들은 찬밥 신세다. 오히려 도를 넘은 고객 줄 세우기와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다. 명품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 봤다./편집자주

“사진에서 블랙핑크가 입은 옷 브랜드는 어디 건가요?”

지난 8일 서울 대치동의 한 카페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던 윤채은양(16·가명)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학교 2학년 진학을 앞둔 윤 양의 요즘 최고 관심사는 인기 아이돌이 입고 걸친 명품을 구하는 일이다. 부족한 돈은 평소 좋아하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굿즈를 팔아서라도 마련할 예정이라고 했다.

윤 양은 “원하는 제품이 올라왔는지 확인하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중고 거래사이트에 들어가 본다”며 “요즘엔 친구들 사이에서도 ‘명품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다”고 말했다.

‘명품’ 열풍이 2030세대를 넘어 10대 청소년에게까지 번졌다. 과거 부유한 중·장년층의 전유물이었던 럭셔리 브랜드가 미래 고객인 MZ세대를 타깃으로 변신에 나서면서 젊은 층 소비자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불황 속에서도 나 홀로 성장 중인 중국·한국 명품 시장 소비자를 겨냥한 ‘한류스타’ 마케팅이 국내 청소년들의 명품 열풍에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권에서 인기가 높은 국내 아이돌 스타가 명품 홍보대사로 나서면서 10대 소비자 사이에 명품 붐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 한 전문가는 “청소년조차 명품 열풍에 젖어든 배경에 미디어의 책임이 크다”며 경계를 당부했다.

구찌 공식 인스타그램

 

◇청소년 명품 소비 이유 “연예인이 사용해서”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작은 패션쇼장을 방불케 했다. 추운 날씨에 책가방을 메고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앳된 학생들 모습 사이로 최대 300만원을 호가하는 몽클레어 패딩부터 생로랑·프라다 지갑·톰 브라운 신발이 마구 스쳐 갔다. 여느 운동화와 마찬가지로 까만 때가 탄 한 명품 신발은 ‘귀한 대접’을 받는 그 브랜드가 맞는지 눈을 의심하게 했다.

‘구찌 테니스 1977 스니커즈’를 신고 학원 건물을 나서던 김모군(18)은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사람이 착용한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엄마에게 사달라고 했다”며 “주변에 워낙 명품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 보니, 없으면 소외감이 들거나 무시당하는 기분도 든다”고 말했다. 김군의 신발은 구찌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86만원에 판매 중이다.

이날 중·고등학생들은 명품 구매 결정에 대중매체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입을 모았다. 명품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고 따라 사는 건 “그다음 순서”라고 설명했다. 중학생 진모양(16)은 “웹툰이나 드라마 주인공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보면 자연스럽게 구매하게 된다”며 “연예인 공항 패션이나 무대의상 영상을 보고 옷을 사는 친구도 꽤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교복 브랜드 ‘스마트학생복’이 10대 청소년 3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청소년 명품 소비 실태’에 따르면 ‘유명인(유튜버·연예인)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예뻐서’ 구매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13.1%로 2위에 올랐다. 1위는 ‘평소 명품 브랜드에 관심이 많아서'(27.4%), 공동 2위는 ‘친구들이 가지고 있으니 소외당하기 싫어서'(13.1%) 순이었다.

최근 드라마로 제작해 화제를 모은 네이버 웹툰 ‘여신강림’에서는 고등학생 인물들이 샤넬 귀걸이부터 톰 브라운 가디건과 이탈리아 명품 스니커즈 골든구스를 착용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노출한다. 엠넷 힙합 경연 프로그램 ‘고등래퍼’ 출연진도 100만원이 넘는 베르사체 재킷과 메종마르지엘라 스웨트셔츠를 입고 플렉스(Flex·뽐내다)라는 힙합 정신을 ‘쿨’ 한 문화로 각인시켰다.

유튜브에서도 10대 청소년들이 직접 제작한 명품 하울(상품 리뷰)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 10대 유튜버는 맥·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같은 명품 화장품들의 디자인과 구매처를 자세히 소개하며 쇼핑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근무하는 이모씨(51)는 “요즘 학생들이 가지고 다니는 명품을 보면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며 “어른들도 잘 모르는 브랜드를 어디서 들었는지 줄줄이 꿰고 있어 놀랐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MZ세대 따라 ‘회춘’ 나선 명품 브랜드…아시아 시장 ‘한류스타’로 공략

10대 청소년들의 ‘명품 홀릭’은 최근 변화 중인 럭셔리 브랜드들의 마케팅 전략과 관계가 깊다. 미국 컨설팅 기관 베인앤컴퍼니 조사에 따르면 오는 2025년 전 세계 명품 시장 고객 비중에서 MZ세대(1980년~2000년대 사이 출생 세대)는 45%로 가장 큰 소비층을 차지할 전망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앞 다퉈 고리타분한 이미지 탈피에 나선 배경이다.

지난 2015년 구찌의 변신은 명품업계의 대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구찌 새 디렉터로 부임한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제품에 커다란 뱀과 벌 그림을 입히고 커다란 GG로고와 레드·그린 컬러를 파격적으로 사용해 구찌를 젊은 브랜드로 다시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새 생명력을 얻은 구찌는 2017년 루이비통에 이어 세계 2위 명품 브랜드로 올라섰다.

루이비통 역시 지난 2017년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슈프림’과 협업하며 패선업계에 또 한 번 파장을 일으켰다. 명품 브랜드의 상징과 같았던 루이비통의 변신에 MZ세대도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이후에도 버버리·발렌시아가·샤넬을 포함한 콧대 높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젊은 세대 가치관에 맞춰 진화하면서 젊은 소비자 사이 명품 붐은 더 빠르게 번졌다.

화려한 변신으로 회춘한 명품 브랜드에도 남은 숙제가 있었다. 전 세계 명품 시장 성장세가 둔화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 중인 아시아 시장은 명품 브랜드의 황금어장과도 같았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 2017년 3180억달러(약 352조원)였던 세계 명품시장 규모는 2019년 3496억달러로 연평균 약 4.8% 성장했다.

특히 자국 경제 부흥에 힘입은 중국 명품 시장은 거침없이 성장했다. 중국 명품 시장 규모는 지난 2017년 215억1480달러에서 2019년 294억1110달러로 연평균 16.9% 커졌다. 심지어 지난해 코로나19로 전 세계 명품 시장이 휘청인 가운데서도 중국 시장은 약 7.6% 성장하며 나 홀로 승승장구했다. 한국 시장 역시 지난 2017년부터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까지 5% 내외로 꾸준히 성장세를 기록했다.

명품 브랜드가 한국에서 ‘인간 샤넬’ 또는 ‘인간 디올’로 불리는 인기 한류 스타를 홍보대사로 기용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아시아 시장의 젊은 층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국내 인기 연예인을 앞세운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국내 청소년 팬들의 ‘우상’인 이들의 홍보 활동이 청소년 명품 열풍에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샤넬은 지난 2018년 그룹 블랙핑크 제니를 샤넬 뷰티 뮤즈로 선정했고 2019~2020년 디올과 구찌는 각각 수지와 아이유를 앰배서더로 발탁했다. 블랙핑크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북미에서도 활약하며 케이팝 역사를 쓰고 있는 인기 그룹이다. 수지와 아이유 역시 출연한 드라마가 중국·대만·태국·홍콩에서 인기를 모으며 국내외 1020세대 팬을 확보하고 있다.

한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들이 한류스타를 통해 실제 기대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홍보대사 제안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10대 팬들이 아티스트들의 명품 홍보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결국 최근 1~2년 사이 빠르게 번진 청소년 명품 열풍은 아시아 시장의 미래 소비층인 2030세대를 겨냥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의 파편 중 하나라는 설명이다. 침체한 명품 시장 부흥을 위한 럭셔리 브랜드들의 몸부림이 10대 청소년에게까지 파장을 미친 셈이다.

안승호 숭실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청소년 명품 열풍은) 명품 브랜드부터 방송 업계와 미디어를 포함해 한두명의 책임이 아니다”며 “청소년조차도 명품이라는 상징물로 자신의 개성과 가능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지금의 명품 열풍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블랙핑크 제니·블랙핑크 리사·아이유·수지 공식 인스타그램©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