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이상연의 짧은 생각 제93호

말의 품격

미국에 살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사용하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정치가 등 공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잘못된 언어 선택으로 곤란을 겪는 사례를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평소 말실수(의도적인 경우도 적지 않지만)가 많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정말 잘못된 단어 하나를 사용해서 곤경에 빠졌습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탄핵 조사를 ‘린치(Lynch)’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보통 집단 구타를 의미하는 린치는 일본에서 자주 쓰는 말이고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던 과거 한국의 미디어에서도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린치는 법적 절차 없이 상대방에게 잔인한 폭력을 가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역사적으로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후 남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불법적으로 처형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흑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N-word’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 이 말을 쓰는 것은 금기처럼 돼 있습니다. 트럼프가 이 단어를 사용하자 탄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던 공화당 인사들조차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트럼프가 이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블루칼라에 호소하려는 전략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단어 자체가 굉장히 부적절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역풍이 더 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흑인들은 자신들끼리는 거리낌 없이 ‘N-word’ 등 금기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한국 신문의 한 칼럼에 “사회적 강자의 과격한 언어는 폭력이지만 약자의 그것은 저항과 해학”이라고 했던데 미국에서 정말 유용한 해석입니다. .

트럼프가 가장 비판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말의 품격’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세계 최고의 강자가 됐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를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부터 자신의 언어를 되돌아 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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