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막막했던 때 가축 선물은 희망…이제 베풀 때”

한국전쟁 후 헤퍼 ‘가축 구호’로 낙농 기반 닦은 축산가 이재복 씨

“전쟁으로 재산 대부분이 사라지고 농토도 만신창이가 된 막막한 상황에서 그들이 준 젖소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젖소 농장을 운영하는 이재복(83) 씨는 연합뉴스 취재진에게 미국의 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헤퍼 인터내셔널(Heifer International)이 6·25 전쟁 후 한국 농촌에 기증한 가축 선물이 오늘날 낙농업의 씨앗이 되었다며, 이제 그때 받은 ‘선물’을 다른 개발도상국에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헤퍼 인터내셔널의 ‘가축 구호’ 수혜자인 이재복 씨.
헤퍼를 평생 은인으로 여긴다는 이씨는 이제 자신이 가진 낙농 자원을 개발도상국에 나눠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사진 = 진가영 인턴기자〕
이 씨는 1969년과 1972년 헤퍼로부터 젖소 두 마리를 받아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지금 그가 안동 근교에서 아들과 함께 운영중인 농장에는 80여마리의 젖소가 있다.

헤퍼는 1952년 4월 닭 종란 7만개를 한국에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1976년까지 종란 21만여개와 젖소, 염소, 돼지, 토끼 등 가축 3200여 마리를 한국에 보냈다. 전쟁으로 황폐화한 한국의 농촌에 자립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씨는 “일제 강점기 젖소사육 농가가 일부 있었지만, 전쟁통에 모두 날아갔다. 그래서 전쟁 후엔 낙농가가 거의 없었고 우유를 마신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며 “그들이 가축을 보내줘서 한국 축산업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우유를 물 마시듯 마시고 고기도 마음껏 먹게 된 것이 다 그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안동에서 전도사로 재직하던 1957년 헤퍼의 카우보이 봉사자 자격으로 한국에 온 미국 농업선교사 킹스베리와 인연을 맺었다.

선교사의 권유로 그는 당시 대전에 있던 기독교 연합봉사회 산하 농민학원에서 낙농 기술을 배웠고 경북 북부지역의 가축 종자 보급 사업에 앞장섰다.

해상 카우보이가 화물선에서 젖소를 돌보고 있다. [사진 제공 = 헤퍼 인터내셔널]

이씨는 1969년에는 가축 인공수정사 면허를 땄고 헤퍼가 기증한 젖소 두 마리로 1973년 본격적으로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1976년 한국에서 헤퍼가 철수한 뒤에는 헤퍼 한국 지사의 대표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그는 홀스타인 등 외국에서 들여온 젖소들이 한국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국의 풍토를 고려한 젖소 관리 방법도 고안해냈다고 한다.

또 1988년엔 동료 낙농업자 8명과 함께 미국 헤퍼 본부를 방문, 전후 한국 축산업 재건 경험을 공유하고 가축 구호 사업의 수혜를 갚기 위한 길도 타진했다고 한다.

40년간 한국 농촌 부흥을 도왔던 딘 쇼웬거트 선교사는 “전쟁의 상처를 극복한 한국 농민들이 가난한 이웃 나라 농민을 돕겠다고 나설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헤퍼 관계자와 어린이들이 ‘노아의 방주’ 작전에 동원된 염소와 포즈를 취했다.
[사진 제공 = 헤퍼 인터내셔널]
실제로 이씨 등은 귀국 후 새끼 젖소 8마리를 살 수 있는 7300달러를 모아 1989년 중국 쓰촨성 농가에 기부했다.

쇼웬거트 선교사는 1989년 현지 매체 ‘아칸소 데모크래트’와 인터뷰에서 “한국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헤퍼 사업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 특히 이 사업이 제3국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 등은 1994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국제센터에서 쌍둥이 임신 확률을 높이는 젖소 인공수정법을 배웠고, 이듬해 정부 계획에 따라 전국 농가에 관련 기술을 전파했다. 이 기술은 우리 낙농가의 젖소 수를 늘리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헤퍼를 평생 은인으로 여긴다는 이씨는 이제 자신이 가진 낙농 자원을 개발도상국에 나눠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내가 언제까지 (건강하게) 활동할지 모르지만, 그때 받은 희망의 선물을 (그때의 우리와 같은) 개도국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재복 씨(사진 오른쪽)와 아들 인호 씨 부자. [사진 = 진가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