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연 칼럼] 한국 양평게이트와 미국 워터게이트

지금으로부터 꼭 49년전인 지난 1974년 7월 8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역사적인 판결 하나를 내렸습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본부에 대한 도청 시도인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측근 9명이 기소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개입 증거가 담긴 녹음 테이프를 ‘국익과 행정부의 기밀 보호를 위해’ 입법부인 연방 의회에 제공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대법원에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만장일치로 “대통령은 공적인 정보를 감출 수 있는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권한이 없다”며 증거 테이프의 의회 제출을 명령했습니다. 이 판결로 테이프를 넘겨받은 연방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에 대한 탄핵 절차에 착수했고 판결 2주 만에 결국 닉슨은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임 발표를 해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중도 사퇴한 대통령이 됐습니다.

닉슨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자신과 측근들의 정치공작을 권력을 이용해 은폐하고, 이를 감시하려는 언론과 국민들에게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을 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죄악’ 이었습니다.

어제 한국 국토부 원희룡 장관이 10억원 이상을 들인 예산타당성 조사와 1조7000억원이 넘는 국가예산이 책정된 서울-양평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갑자기 백지화한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50년이 넘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경제성 조사까지 마친 고속도로 노선이 갑자기 대통령 부인 일가가 소유한 토지 쪽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변경됐고, 이렇게 변경된 노선 탓에 오히려 추가 예산이 필요해졌다는 의혹이 일었습니다. 한국의 언론도 이러한 의혹마저 무시하기는 힘들었는지 취재를 시작했고 추가 의혹이 터지자 느닷없이 사업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거액의 예산이 책정된 국책 사업을 장관 1명의 결정으로 간단히 백지화한다는 것이 미국에서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일이고, 우리의 모국이 이런 치기어린 결정으로 진실을 은폐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사실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사무실 침입자들이 문을 열어놓기 위해 잠금장치에 붙여놓은 테이프를 경비원 1명이 우연히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근성있는 기자 2명과 용기있는 편집진이 사회면 가십에 나오기도 힘들만한 작은 사건을 끝까지 파고 들었고, 내부의 고발이 이어지면서 결국 치명적인 진실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 고속도로 게이트는 “걸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배짱이 아니고서는 시도하기 조차 힘든 권력형 비리 의혹입니다. 50년전 보다 훨씬 더 권력에 대한 감시가 치밀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식의 행정력 남용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워터게이트 취재 기자들은 작은 정보를 조각처럼 모아 거대한 퍼즐을 완성했지만 한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전자정부 시스템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간 회의 자료와 공문서 등이 남아 있을텐데 어떻게 의혹을 방어할 지 궁금합니다.

사실 이번 고속도로 게이트도 “대통령 부인 일가에 대한 의혹은 사실이 아니지만 국민 여론을 감안해 변경 이전의 원안으로 되돌리겠다”고 하면 그만이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속사정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사업을 뒤집어 엎고 정치쟁점화를 선택한 것을 보면 이미 너무 멀리 와있어서 되돌리기 힘든 상황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가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결국 진실은 밝혀지며, 은폐를 시도했던 권력은 시인하는 권력보다 훨씬 가혹한 응징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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