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꿩에게서 배운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내고향 괴산에는 느티울이라는 너른 내가 있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넓지 않고, 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넓다. 느티울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느티나무 여울”이 음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리라.1959년의 그 끔찍한 사라호 태풍 때 많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령 500-600년의 느티나무가 많다. 그래서 지명도 괴산(槐山)이다.

나무가 어찌나 큰지 가운데 너른 공간이 있어 어렸을 적에 무둥을 하고 친구들이 들어가 소꿉놀이를 했다. 미운 녀석은 나올 때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 울다가 교육청 직원들이 퇴근하다가 건져 주곤 했다. 사라호 태풍 때 여러 그루가 넘어졌는데, 서울의 어느 가구회사가 한 그루마나 학습용 자 1미터짜리를 천 개 만들어 준다는 조건으로 가져갔으니 그 크기를 알 만하다.

도심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읍내를 조금 벗어나 느티울 근처에 있는 산골마을 사오랭이에 가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곳 촌로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끔 꿩이 이 산에서 강 건너 저 산으로 날아가다가 중간에 빠져 죽는다고 한다. 강은 거리의 눈대중이 평지보다 어렵다.

꿩은 장거리 철새가 아니라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넘어 넘어가는 정도의 비상 능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강폭의 눈대중이 어려운 꿩은 70%의 거리까지 날아갔다가 힘이 빠지면 아직 갈 길이 먼 줄로 착시를 이르켜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오다가 지쳐 빠져 죽는다. 곧장 갔으면 저쪽까지 날아갈 수 있었을 텐데 지레 포기하고 되돌아오다가 죽는다.

죽은 꿩 이야기를 하면서 어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도 저런 거란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듣고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 들고 철들며, 인생에 보대끼다 보니 어른들의 말씀이 새록새록 생각날 때가 많다. 다른 아이들은 어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꿩의 이야기가 일생의 가르침이 되었다. 어차피 인생은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느티울에 빠져 죽은 꿩을 회상하며 일어섰다.

영화 《레옹(사진)》에서 주인공 마틸다가 입을 열어 레옹에게 처음 물은 질문은 이렇다.

“인생이란 게 본디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제가 어린 탓인가요?”

그 말에 레옹이 이렇게 대답한다.

“인생이란 본디 그렇게 힘든 거란다.”

누군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있으랴?

누군들 네지끼(ね‐じき) 세우고 명동 바닥에 활개쳐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제 황혼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그 숱한 애환이 흑백필름처럼 지나간다.

좀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도 있었을 텐데…..

그곳이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둘레길이 되었다고 한다.

한 번 가 보자, 가 보자 하면서도, 가위눌린 고향의 서러움 때문에 아직 못 가봤다.

이제 가려니 그 둘레 길을 걷기에는 내 장딴지의 힘이 너무 허약하다.

내가 그 꿩인가?

<동서양의 정치사와 정치사상사를 연구해 왔으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정치사』와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 등의 저서를 내고 『군주론』 『외교론』 등을 번역했으며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완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