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지켜온 사람들’은 한인 사회의 현장에서 앞에 서기보다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온 이들의 삶을 기록하는 인터뷰 시리즈다. 첫 회로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KCPC)에서 21년간 부목사로 사역해 온 조근상 목사와 만남을 가졌다.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목회의 부르심, 스승의 소천, 코로나 시기의 보이지 않는 사역, 그리고 사역을 마친 뒤 ‘챕터 2’를 앞둔 마음을 차분히 풀어냈다. /편집자주
‘너는 내 것이라’에서 ‘교회를 부탁해’까지…사역을 지탱한 두 문장
담임의 꿈 대신 예배의 길… “찬양사역 헌신했던 은혜의 시간 감사”
어떤 이는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고, 어떤 이는 한 걸음 뒤에서 공동체를 지탱한다.
조근상 목사는 후자의 길을 선택해 온 사람이다.
그는 ‘1인자’가 되는 길 대신 조력자의 자리를 택했다. 목회자라면 한 번쯤 떠올릴 법한 대형교회 담임목사라는 전형적인 성공의 서사는 애초부터 그의 목표에 없었다.
애틀랜타 한인 교계를 대표하는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KCPC)에서 21년간 부목사로 사역한 그는, 교회의 성장과 변화 한가운데서 늘 뒤편을 맡아왔다.
교회 초기 멤버였던 1세대 성도 약 100여 명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한 시대의 끝을 지켜봤고, 동시에 새로운 이민 세대가 교회로 들어오는 변화를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그의 사역은 한 교회의 기록을 넘어, 한인 이민교회가 지나온 시간과 맞닿아 있다.
사역지를 떠나며 비로소 꺼낼 수 있게 된 이야기들, 조력자의 자리가 남긴 의미를 이 인터뷰에 담았다.
다음은 조근상 목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사역, 그 이후의 시간
Q. 지난 주일, 한 교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목사님께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나요?
“아직은 다소 어색합니다. 동시에 적응하려고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역시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까요. 지난 21년 동안 애틀랜타에 머무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사역해 왔는데, 이제는 교회에 대한 여러 걱정을 머릿속에서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Q. 현 시점에서 돌아볼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 선택은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사실 제가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인도하셨다고 느낍니다. 어린 시절에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15살 때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돌아가셨고, 이듬해에는 아버지를 너무 그리워하시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시절은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삼형제 중 둘째인데, 당시 형님은 대학 진학을 위해 재수를 준비하던 상황에서 졸지에 가장이 되었고, 저는 사춘기 한가운데 있던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고등학생이었고,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형님이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에 다니며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는 학교에 가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망이 없다고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예수전도단이라는 단체에 가게 되었고, 1989년 12월이었습니다. 추위에 떨며 구세군 회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는데, 찬양하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 그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이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선교사 훈련을 받았고, 이후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사역하게 됐습니다. 벌써 37년 전의 일이네요. 그때는 제가 목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써 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이미 저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Q. 사역자로 부르심을 느꼈을 당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몰라 무작정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경배와 찬양 운동이 한창 뜨거웠는데, 어느 날 예수전도단 화요 모임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시편 113편 ‘해 뜨는데부터’라는 찬양이 불려졌습니다. 보통은 율동과 함께 빠르게 부르는 찬양이지만, 그날은 인도자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해 뜨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느리게 인도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임재가 깊이 다가왔고, 저는 그 자리에서 ‘제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하게 됐습니다. 그 예배를 인도하신 분이 ‘부흥’, ‘비전’을 작곡하신 고형원 선교사님이었고, 이후 지금까지 저의 영적 멘토로 함께해 주고 계십니다.
막상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했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화요 모임이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몇 시간씩 기도하며,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묻는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선교사 훈련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는 집안의 반대도 컸습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냐”, “예수에 미쳐도 곱게 미쳐라”라는 말을 들으며 훈련을 마쳤습니다.
이후 우연히 미국에서 오신 분이 가져오신 호산나 찬양집을 보며 미국 찬양을 한국어로 번역하게 됐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 말씀을 바탕으로 한 ‘우리 함께 기뻐해’라는 찬양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번역하는 데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화요 모임에서 그 찬양을 소개하고 함께 불렀는데 반응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그 일을 통해 제게 주신 은사가 찬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 같습니다. 부르심을 받으면 두려움이 찾아오지만, 그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은혜 또한 함께 주어진다는 것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 스승의 죽음, 사역자의 자리
Q. 2016년, 아틀란타 한인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정인수 목사께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소천하셨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 마지막을 지켜보셨다고 들었는데, 그 시간은 목사님께 어떤 경험이었나요?
“2004년, 정인수 목사님께서 어바인에서 사역하고 있던 저를 찾아와 함께 사역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습니다. 작은 체구였지만 큰 비전을 품고 계신 모습이 인상 깊었고, 참 좋아 보이는 분이셨습니다. 기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바로 합류하지는 못했고,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셨습니다.
결국 2005년 1월 3일부터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KCPC)에서 1호 전문 찬양사역자로 찬양 인도를 맡게 됐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제게 예배 전체를 총괄해 보라고 하셨고, 저는 ‘예배 디렉터’라는 공식 명칭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KCPC로 오기 직전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하용조 목사님의 콜링으로 사역하며 배웠던 예배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 이후 KCPC의 성장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전통 장로교회였던 KCPC에 새로운 예배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부와 2부는 전통 예배의 강점을 살리고, 젊은 세대를 위한 3부 예배를 활성화하면서 교인이 빠르게 늘었고, 이후 4부 예배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정 목사님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을 키우는 분이셨다는 점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어, 한 번 본 얼굴과 이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200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그때부터 정 목사님은 제게 영적 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많은 사랑과 함께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시켜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2주 동안은 캄보디아 선교 일정과 한국에서의 책 출간 일정으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은 한국에 하루 먼저 들어가셨고, 저는 다음 날 귀국했는데, 잠을 자던 중 새벽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습니다. 정 목사님이 소천하신 모습이 제 육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그 사건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영적 아버지였던 정 목사님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조 목사, 교회를 잘 부탁해.”
그 한마디가 정 목사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제가 오랜 시간 사역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 코로나 시대, 보이지 않는 사역
Q.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예배가 온라인으로 전환됐고, 목사님께서는 영상과 예배 시스템을 맡아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어떤 시간이었나요?
“정인수 목사님이 돌아가신 이후 교회가 갑작스럽게 어려운 상황을 맞으며, 공동체 안에서도 여러 갈래의 의견이 생기고 힘든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다행히 새 담임목사님이 오시면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나 싶었는데, 그 시점에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배만큼은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가대와 찬양팀에 연락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녹화를 시작했습니다. 한 공간에 모일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각기 다른 시간대에 나눠 녹화했고, 이를 편집해 유튜브로 송출했습니다. 새벽설교 역시 매일 녹화해 업로드해야 했기에 일정 관리부터 편집까지 쉼 없이 돌아가던 시간이었습니다.”
Q. 비어 있는 예배당에서 카메라를 향해 예배를 준비하며, 가장 크게 느끼셨던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정 목사님이 소천하셨을 때도 가장 사랑하는 분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컸지만,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은 또 다른 차원의 아픔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준비하며 텅 빈 본당에 홀로 앉아 있다가, 결국 통곡하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이 속히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 연합교회 20여년 사역의 기억들
Q. 20여 년의 사역 가운데 지금도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예배의 한 장면이 있다면요?
“마지막 예배입니다. 1부와 2부 예배에서는 사임 인사를 짧게 드렸고, 제가 인도하던 3부 예배에서는 성도들과 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소원’이라는 찬양이었는데,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이야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분을 닮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가사는 제 고백이었습니다.”
Q. 사역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2년 전, 가까이 지내던 한 성도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사역 가운데 큰 어려움을 겪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관계의 문제는 늘 존재하지만, 그 일은 제 사역 여정에서 유독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특히 그 여파로 제 주변의 많은 분들까지 함께 힘들어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점이 가장 아팠습니다. 결국 사임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길 또한 열어주셨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고, 감사의 고백으로 남습니다.
Q. 정통 신학교 과정을 밟지 않고 예수전도단 출신 찬양사역자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한국교회와 미국교회의 차이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신가요?
“한국교회는 기업이나 계급사회의 구조가 형성된 경우가 많아, 사람을 키우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반면 미국교회는 공동체 중심의 문화 속에서 이전 사역자가 다음 사역자들을 세워 주고, 그 과정을 통해 존경과 신뢰가 쌓이며 사역의 유산이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Q. 지금의 시대 속에서 교회는 어떤 질문 앞에 서 있다고 보시나요?
“AI와 유튜브가 일상이 되고, 유명인의 간증이 선교사의 증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교회가 과연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로 기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근상 목사의 마지막 송년주일 찬양 동영상
◇ 앞으로의 시간 ‘챕터 2’
Q. 첫 번째 사역의 챕터를 마치고, 개인으로서의 ‘챕터 2’가 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가요?
“우선 한국에 머물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사역 때문에 늘 2주 이상 머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머물며 충분히 기도하고 사람들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제가 제대로 서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Q. 다음 챕터에서, 이전보다 더 자유롭게 시도해 보고 싶은 사역이나 삶의 모습이 있다면요?
“특정 교회에 묶이기보다, 연합하며 함께할 수 있는 사역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방향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Q. 최근 큰따님 결혼식을 오랜 사역의 터전이었던 교회에서 치르셨습니다. 많은 하객이 모여 교회 주차장까지 인파가 이어졌는데, 그날은 어떤 마음이셨나요?
“제 가장 큰 소원은 자녀들이 교회에서 예배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소원이 이루어졌고, 많은 분들이 함께해 축복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Q. 오랜 시간 함께 예배했던 성도들에게, 지금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사임 인사를 하며 읽었던 성경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17장 9–10절 말씀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제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Q. 끝으로, 사역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의 조근상 목사에게 지금의 목사님이 한마디를 건넨다면요?
““조 목사, 그동안 수고했어.”
그 말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