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C 또 찬밥…”최고 인력 왜 활용안하나?”

‘마이크’ 뺏기고 가이드라인 배포도 저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사태 속에서 주무 기관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있다.

CDC가 마련한 경제 정상화 가이드라인의 배포를 백악관이 막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런 논란이 더욱 커지는 모양새다.

이 사실을 처음 알린 AP통신은 7일 코로나19 억제를 위한 CDC의 제안들이 거듭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뒷전으로 밀리면서 공중보건 전문가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십 년 동안 각종 전염병 퇴치를 지휘한 CDC의 경험을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미시간대 보건역사학자인 하워드 마켈은 “여러분은 감염병에 관해서는 세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전투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을 활용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1946년 말라리아 확산 예방을 위해 ‘전염병센터’라는 이름으로 애틀랜타에서 처음 문을 연 CDC는 예산 1000만 달러에 직원 수백명으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70억 달러의 예산과 1만1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거대 기관이 됐다.

AP에 따르면 CDC는 백신과 진단검사 기법을 개발하고 어떤 치료법이 최선인지, 어떻게 질병과 싸우고 예방해야 하는지 등을 조언한다.

센터 소속의 엘리트 인력 중에는 세계 최고의 질병 조사관, 미생물학자, 병리학자 등이 포함돼 있다.

CDC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2009년 ‘돼지독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알려졌던 신종플루 대유행 사태다. 당시 CDC는 거의 매일 브리핑을 했고, 소속 전문가들이 바이러스와 백신 개발에 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공유했다.

사실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CDC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지난해 12월 말 CDC는 중국에서 새로운 질병이 발병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기자들을 상대로 자주 전화 브리핑을 했으며, 신속하게 진단검사법 개발에 나섰다고 AP는 전했다.

그러나 CDC가 개발한 진단검사 키트에서 지난 2월 결함이 발견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독감에 걸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징후를 찾기 위한 목적으로 CDC가 운영하기로 한 감시 시스템 구축도 늦어졌다.

중국보다 유럽에서 입국하는 감염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것도 CDC의 실책이었다.

무엇보다 CDC가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서 설 자리를 잃은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AP는 분석했다.

CDC 산하 국립면역호흡기질환센터의 낸시 메소니에 국장은 지난 2월 말 ‘바이러스가 억제됐다’는 다른 정부 관료들의 주장과 달리 “이 병이 더 발생할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제 발생하고 이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심하게 아플 것이냐의 문제”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 발언으로 주가가 급락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가 전면에 나섰고, TF를 이끄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CDC로부터 코로나19에 관한 공보 기능을 박탈했다. 3월9일 이후로는 CDC 언론 브리핑이 완전히 중단됐고, 메소니에 국장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버트 레드필드 CDC 소장의 목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았다.

그 빈 자리를 대신 채운 전문가들은 데비 벅스 TF 조정관과 앤서니 파우치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이었다.

CDC 출신의 유명 과학자 제임스 쿠란 박사는 AP에 “백악관 브리핑에서 CDC는 항체검사가 효과가 있을지 등에 대해 말해야 한다. 감염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바이러스를 지니는지도 말해야 한다. 이런 질문은 CDC가 답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3월 초 노약자의 여객기 탑승 자제를 권고하라는 CDC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했고, 4월에는 백악관 TF가 CDC에 ‘8월까지 크루즈 운항을 중단하라’는 지침을 수정할 것을 압박했다. 그 결과 현재 크루즈에 관한 CDC 지침은 ‘7월에는 다시 운항할 수 있다’로 바뀌었다.

이어 CDC가 경제 정상화를 위한 17쪽짜리 직종별 세부 가이드라인을 지난 1일 배포하려던 것을 백악관이 저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백악관 일각에서는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안전한 경제 정상화를 위한 필수적 지침이라고 판단했으나, 마크 메도스 비서실장 등은 연방정부 차원의 세부 가이드라인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반대파들은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고 AP가 전했다.

또 가이드라인 배포가 코로나19 저지를 위한 봉쇄 조치를 둘러싸고 지지층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더할 수 있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CDC 지휘부의 입이 묶이자 전직 간부가 대신 나서는 듯한 모습도 연출됐다.

톰 프리든 전 CDC 국장은 이날 CNN 방송을 통해 코로나19 대유행에 관한 ’10가지 진실’을 배포,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는 “뉴욕의 상황은 정말 나쁘다”면서 “지금은 아직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시작 단계”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검사 확대와 백신 개발을 위해 정부와 민간 기업이 손을 잡아야하고, 코로나19 이외 다른 질환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또다른 전염병의 출현에 대비해야한다고 강조했다./연합뉴스

백악관 브리핑 도중 로버트 레드필드 CDC 소장을 쳐다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