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레이디 가가와 질 바이든

한미 정상회담 1달 남기고 한국 외교 ‘흔들’…한인사회도 불안

블랙핑크 공연 누락이 원인?…반도체법, 북핵 등 현안은 ‘뒷전’

“나는 질 바이든의 남편이자 레이디 가가의 친구입니다(I’m Jill Biden’s husband and Lady Gaga’s friend.)”

지난 대선 전날밤인 2020년 11월 2일 최대 경합지역인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 조 바이든 당시 대통령 후보가 한 말이다. 드라이브인 방식으로 열린 이날 유세에는 질 바이든 여사도 참석했고,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공연을 한뒤 “투표로 트럼프를 몰아내자”고 열변을 토했다. 부통령 시절부터 바이든 내외와 각별한 관계였던 레이디 가가는 2달후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돼 미국 국가를 부르게 된다.

레이디 가가는 취임식 3개월 후 K팝 스타 블랙핑크와 신곡 ‘사워 캔디(Sour Candy)’를 발표했고, 이들은 최근 나란히 한미 외교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질 바이든 여사가 레이디 가가와 블랙핑크를 윤석열 대통령의 4월 백악관 국빈만찬 공연가수로 점찍어 한국 측에 요청했는데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대통령실 외교안보 라인이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등 한국 언론은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를 인용해 “K팝에 관심이 많은 질 바이든 여사가 지난 1월 공연을 제안했지만 김성한 실장 등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고 이후 7차례나 요청이 이어졌지만 모두 무시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외교 라인을 통해 이같은 보고 누락을 알게 된 윤 대통령이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고 결국 김 실장은 미국 국빈방문을 한달도 남기지 않은 지난 29일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실 의전비서관과 외교비서관마저 모두 교체돼 이들의 경질도 ‘레이디 가가-블랙핑크’ 문제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김일범 의전비서관은 윤 대통령의 방일 직전 “모두 건승하시라”는 암호같은 메시지를 남기고 대통령실을 떠났다. 또한 김성한 실장의 후임으로 조태용 주미대사를 임명하면서 국빈방문을 현지에서 준비해야 하는 주미대사관도 수장을 잃고 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및 반도체법으로 인한 한국 기업의 피해 구제 방안 등 경제 문제와 북핵 대응을 위한 핵우산 및 우크라이나 지원 등 안보 문제를 다뤄야 하는 중차대한 외교 무대다. 또한 윤 대통령의 연방의회 연설이 예정돼 있어 연설 내용 조율을 위한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라 외교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엄중한 시기를 앞두고 지엽적인 공연 문제로 외교 라인이 전부 교체됐다는 것은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의심하게 하는 일이다.

한국 야권 등 일각에서는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의 공연을 먼저 제안한 것은 질 바이든 여사와 백악관이 아니라 한국 대통령실”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양국의 경제·안보 현안 대신 문화행사를 부각시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외교실책을 덮고 한미 정상회담을 한편의 문화 콘텐츠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 정치의 전통으로 볼 때 대통령 부인이 국빈방문시 초청국가의 음악가를 직접 선정해 상대 정부에 섭외를 요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전례 또한 없다. 또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질 바이든 여사가 K팝에 관심이 많다는 주장은 미국에서는 처음 듣는 뉴스다. 바이든 여사는 지난해 한국 방문 당시 김건희 여사에게 “주변의 조언이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라면서 “그저 자신이 되라(just be yourself)”고 독립성을 강조했었다.

외교 안보 담당자들이 최대 우방인 미국 백악관과 영부인이 강력하게 요청한 공연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수차례나 묵살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바이든 부부와 레이디 가가의 친분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측이 블랙핑크와의 인연을 엮어 공연을 추진했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일자 이견을 보인 담당자들을 문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만약 한국 대통령실이 밝힌 ‘질 바이든 여사 요청’ 주장이 허위로 밝혀질 경우 한미 관계에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로 한미 외교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미주 한인들과 미국 진출 한국기업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외교라인 공백으로 한미 정상회담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한미 관계와 동포 사회 위상에도 악영향을 주게 되고, 반도체와 전기차 등 주력업종의 한국기업들도 타격을 받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워싱턴 DC 국빈방문 이후 미국 도시 한인타운을 찾아 동포사회와 한국기업을 돌아볼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로는 휴스턴과 보스턴, 애틀랜타 등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방문 준비 과정에서의 여러 잡음 탓에 워싱턴 DC에서의 외교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한인타운 방문의 모멘텀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상연 대표기자

조 바이든 대통령 내외가 부통령 시절 레이디 가가와 찍은 사진. 왼쪽부터 딸 애슐리 바이든, 레이디 가가의 여동생인 패션 디자이너 나탈리 저마노타, 바이든 대통령, 레이디 가가, 바이든 여사. /조 바이든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