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장 “애틀랜타서 어릴 때 인종차별 직접 경험”

뉴욕시장 출마 한인 후보 인터뷰…”유치원 여교사 나만 거부”

“베트콩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인종평등이 나의 사명”

미국 최대은행 JP모건 체이스의 국제법률부서 매니징 디렉터였던 아트 장(한국명 장철희)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여름 사표를 냈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없었더라면 한인 2세로서 뉴욕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화상 인터뷰하는 아트 장 후보 (뉴욕=연합뉴스)

 

자신과 같은 아시아계가 미국 주류사회에서 약진하는 동안 정작 흑인들은 아직도 경찰에게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는 현실이 장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뉴욕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장씨는 3일 연합뉴스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흑인 사회를 돕고 인종 간 평등을 이루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흑백 분리 정책이 철저하게 시행되던 1963년 남부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장씨는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장씨는 유치원 입학 때 한 여성 선생님이 자신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남동생이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인 베트콩과 싸우는 상황에서 장씨를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황당한 이유를 댔다고 한다.

이 같은 경험 속에서 장씨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백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규정한 장씨는 “흑인 민권운동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좀 더 평등한 삶을 살고 있지만, 흑인들은 아직 민권운동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JP모건에서 일하기 전에는 뉴욕을 기반으로 한 유명 벤처투자자였다. 뉴욕시의 지원을 받는 벤처그룹에 직접 투자하거나, 투자자를 연결해줬다.

20대 때에는 뉴욕시에서 근무했고, MBA 학위를 따고 투자은행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2000년대 초반의 닷컴 열풍 때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장씨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봤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JP모건이 좀 더 많은 수익을 내도록 내 능력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도 정당화할 수 없었다”며 “내 능력을 이웃들이 실제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오는 6월에 열릴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 선출 경선에 출마할 장씨는 선거 결과에 자신감을 보였다.

현재 30명에 가까운 후보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 경선에 참여했던 앤드루 양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17%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장씨는 “난 정치에 관심이 있어 출마한 것이 아니라 뉴욕을 사랑하고, 뉴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출마한 것”이라며 “다른 후보들을 보면 누구도 뉴욕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후보이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은 후보다”라며 “결국 내가 여러 후보 중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현지 유력지인 뉴욕타임스(NYT)도 최근 이례적으로 장씨의 출마 선언을 소개했다. 장씨가 뉴욕 정관계에선 어느 정도 지명도를 갖췄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그는 뉴욕 정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뉴욕시 선거자금감독위원으로 9년간 재직했다. 아시아계로서 처음이었다.

장씨는 한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한국어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난 한국인이라서 강하다”라며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를 통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인 최초로 뉴욕시장에 출마하는 그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한인사회의 표를 기대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인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도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장 후보와의 일문일답.

“뉴욕 시장에 출마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 22세 때인 1985년 예일대를 졸업한 뒤 400달러만 들고 뉴욕에 왔다. 이후 24세 때 건축회사를 세웠는데 3년 뒤 부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뉴욕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다. 뉴욕시에서 일을 얻었고, 나중에 뉴욕대(NYU)에서 MBA 학위를 따고 투자은행에서 일했다. 난 자신을 위해 출마한 것이 아니다. 난 뉴욕을 사랑하고, 뉴욕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출마했다. 정치는 내 전문분야가 아니다. 내 전문분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선거 전략은 무엇인가.”

▲ 현재 30명에 가까운 후보들이 나왔지만, 누구도 확실한 리드를 잡지 못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온 앤드루 양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지지율이 17%에 불과하다. 승리를 위한 내 전략은 간단하다. 다른 후보와의 차별화다. 난 재밌고 독특한 삶을 살았다.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성과를 냈다. 현재 뉴욕 시장 후보 중에서 그 누구도 그런 경험이 없다. 현재 내가 유명 후보는 아니지만, 유권자들은 결국 나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유명 후보가 아니라고 하지만, 최근 유력지인 뉴욕타임스(NYT)가 출마 사실을 상당히 크게 소개해 화제가 됐다. 이유가 무엇인가.”

▲ 난 한 번도 선거에 나간 적이 없다. 그러나 뉴욕 언론과 정계에서 아웃사이더는 아니다. 투자업계에서 일하면서 뉴욕시의 업무도 함께 했다. 뉴욕시 선거자금감독위원으로 9년간 재직했는데 아시아계로서는 처음이었다. 또 2018년 뉴욕주(州) 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는데도 나름 역할을 했다. 전국적인 지명도는 없지만, 뉴욕의 정관계에는 잘 알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JP모건 체이스에서 매니징 디렉터로 일하다가 사표를 내고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해 여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인 JP모건이 좀 더 많은 수익을 내도록 내 능력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 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JP모건이 벤처투자자인 나를 스카우트해 국제법무실의 업무를 맡긴 것도 은행 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후보들을 보면 누구도 뉴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뉴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능력을 사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재 모든 뉴욕 시장 후보들이 인종 문제 해결을 주장하지 않나.”

▲ 난 1963년 흑백 분리 정책이 철저하게 시행되던 남부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유학생이던 아버지가 취직한 뒤엔 오하이오주 백인 동네로 이사해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성장했다. 난 어릴 때부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자 첫 번째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선생님의 남자 형제가 베트남에 배치돼 나처럼 생긴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이유를 댔다. 학교 등하교 때 길 건너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백인 소년들이 있으면 내 안전을 위해 길을 건너지 않았다. 지금 나는 피부색이나 인종과 관계없이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러나 내 성공은 1960년대 흑인들이 민권운동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시아인들은 흑인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아시아인들은 좀 더 평등한 삶을 살고 있지만, 흑인들은 아직도 민권운동의 결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난 흑인사회를 돕고, 인종 간 평등을 이루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에 20만 명 이상의 한인이 살고 있는데 한인사회의 지지를 기대하나.”

▲ 지지를 받는다면 너무 감사하지만, 한인 사회가 한국계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지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한인 사회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뉴욕가족상담소(KAFSC) 후원 등의 활동을 해왔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동질감이 있다. 난 그 동질감이 자랑스럽다. 또 난 한국인이라서 강하다. 미국에서 특정국가 출신이나 인종 커뮤니티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추는 것이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투표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투표율은 아직도 충분치 않다. 한인 사회도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투표하지 않으면 변화의 가능성 자체가 없다.

아트 장 후보 (아트장 선거운동 사이트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