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SK 전쟁 볼모된 폭스바겐, 등 돌렸나

2017년 폭스바겐 배터리 수주전 패배한 LG, 영업비밀침해 소송전 결심

폭스바겐 2019년 노스볼트·궈쉬안 지분 잇단 매입…예고된 ‘각형’ 전환

세계 최대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이 앞으로 전기차에 ‘각형’ 배터리를 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파우치형’을 생산하는 LG와 SK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공교롭게도 폭스바겐은 LG에너지솔루션(LG화학 옛 전지사업부문)과 SK이노베이션이 벌이고 있는 이차전지 소송전의 기폭제가 된 기업이다. 업계에서는 두 기업 간 소송전에 끼여 볼모가 된 폭스바겐이 한국 기업에 냉정하게 등을 돌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16일 완성차 및 배터리 업계 등에 따르면 폭스바겐은 전날 ‘파워 데이’를 열고 2023년부터 각형을 기반으로 한 통합 배터리셀을 자사가 생산하는 전기차의 80%에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기차 배터리는 크게 △각형 △파우치형 △원통형 등 3종류로 나뉘는데,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현재 폭스바겐에 파우치형을 공급하고 있다.

각형은 알루미늄 금속을 외관 소재로 사용해 내구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에너지 밀도가 높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파우치형 배터리는 비닐 재질의 주머니에 담는 형태로, 개발 난이도가 높지만 에너지 밀도가 높고 모듈과 팩 구성이 용이하다. 원통형은 기계적 안정성이 뛰어나지만, 각형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밀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 같은 각 형태별 배터리 셀 개발과 생산은 장기적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 문제로 폭스바겐의 이번 각형 전환 선언은 한국의 두 배터리 기업에는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폭스바겐이 파우치형에서 각형 배터리로 전환하는 것을 두고는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우선 폭스바겐이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을 겨냥한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중국의 배터리 생산 기업인 CATL과 BYD가 각형을 생산하는데, 중국에서 전기차를 판매하려면 이들 업체의 배터리를 탑재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 이번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폭스바겐의 전체 매출 중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40%가량으로 추산된다.

특히 폭스바겐은 지난해 중국 3위 배터리 업체 궈쉬안의 지분 26.5%를 인수해 최대주주로 올라서기도 했다. 전날 발표에서 폭스바겐은 2025년까지 중국에 1만7000개의 급속충전소를 설치하겠다고 밝히는 등 중국 시장과 관련한 내용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더구나 폭스바겐이 2019년 지분 20%를 보유한 스웨덴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도 각형을 생산하기 때문에 폭스바겐의 이번 결정은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으로 배터리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LG와 SK가 미국에서 벌이고 있는 소송전이 폭스바겐의 각형 선택을 굳히게 했다는 해석도 있다. 두 기업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폭스바겐의 2차 MEB(폭스바겐 전기차 플랫폼)의 배터리 물량을 두고 수주전을 벌였는데, 이때 SK이노베이션이 당시 LG화학을 제치고 공급사로 선정됐다. LG화학은 SK에 폭스바겐 물량을 뺏길 거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고, 이때의 충격이 그간 벼르던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LG화학은 2019년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영업비밀침해소송을 제기했는데, 판결 결과에 따라 수입금지 조치가 뒤따를 수 있어 폭스바겐은 졸지에 볼모가 되는 신세가 됐다. 비록 ITC가 폭스바겐 공급 물량에는 2년간 수입금지 유예 조처를 내렸지만, 향후 10년간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내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폭스바겐은 대체 공급선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폭스바겐이 노스볼트와 궈쉬안 지분을 인수하는 등 배터리 공급선 다양화에 나선 데에는, 이번 LG와 SK 간의 소송전처럼 배터리 공급사 이슈로 곤경에 처할 불확실성을 최소화하자는 판단이 깔려 있을 것으로 본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최대 고객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자동차 판매 집계 전문업체인 포커스투무브에 따르면 폭스바겐의 지난해 글로벌 완성차 판매량은 931만대로, 11.6%의 점유율로 1위에 올라 있다.

특히 폭스바겐은 전기차 전환이 가장 빠른 기업으로, 한국자동차산업협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폭스바겐의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211.1% 증가한 38만대 수준으로 테슬라(44만대)를 바짝 뒤쫓고 있다. 지난해 순수 전기차(BEV),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수소전기차(FCEV)를 모두 합한 전기동력차는 294만대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폭스바겐의 전기차 점유율은 약 13% 수준으로 추산된다.

지금까지는 테슬라가 원통형, BMW·벤츠는 각형, 폭스바겐·GM·현대·기아차는 파우치형을 주로 사용해왔는데 폭스바겐이 각형으로 선회하면서 배터리 업체들의 희비도 엇갈리게 된 셈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파우치형과 원통형을, SK이노베이션은 파우치형을 생산하고 있고, 배터리 형태 전환은 단시간 내 가능하지 않은 문제여서 LG와 SK에는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다. 삼성SDI의 경우 각형과 원통형을 생산하지만, 이보다 규모가 큰 CATL과 BYD 등 중국 업체들이 각형을 주력으로 삼고 있어, 큰 수혜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KB증권은 이날 보고서에서 “폭스바겐이 2030년까지 규격화된 각형 전지 비중을 확대하고 배터리 공장 내재화를 통한 원가절감에 나서겠다고 밝힌 점은 한국 배터리 기업에는 부정적”이라면서도 “다만 아직 준비할 시간이 있기에 지나친 우려감은 경계해야 한다. 폭스바겐의 계획대로 2030년 240GWh를 내재화한다고 하더라도 2030년 예상 수요의 10%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폭스바겐의 MEB(전기차 전용 플랫폼) 모델 © New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