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리·A.프레세·코몰리 등 신흥 브랜드, 명품과 스트리트웨어 사이 공백 파고들어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일본 남성복 브랜드들이 글로벌 패션 시장에서 급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리 패션위크부터 뉴욕·밴쿠버 부티크까지, 패션 업계 종사자와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레이블이 일본에서 나오고 있다는 내용이다.
◇ 어떤 브랜드들인가
NYT가 주목한 브랜드는 오라리(Auralee), A.프레세(A.Presse), 코몰리(Comoli), T.T, 소시오츠키(Soshiotsuki), 케일(Cale), 요코 사카모토(Yoko Sakamoto), 스스타인(Ssstein)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 내에서 10년 안팎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들로 최근 2~3년 사이 서구 시장에서 빠르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라리는 2015년 설립됐으며 2018년 도쿄 패션 프라이즈 수상을 계기로 파리 패션위크 캘린더에 이름을 올렸다.
A.프레세는 설립 5년째의 신생 브랜드임에도 프랑스 축구선수 피에르 칼뤼와 배우 쿠퍼 호프만이 착용하며 리세일 시장에서 웃돈이 붙는 수준의 인기를 얻고 있다.
소시오츠키는 2025년 LVMH 프라이즈를 수상했으며 자라와의 협업도 성사시켰다. 스스타인의 키이치로 아사카와는 2024년 도쿄 패션 프라이즈를 받았다.
가격대는 저렴하지 않다. 오라리 실크 봄버 재킷은 약 1700달러, 스스타인 쇼어 재킷은 약 1000달러 선이다. 요코 사카모토의 더스티 핑크 트러커 재킷은 628달러, T.T 스웨터는 820달러에 책정돼 있다.
그럼에도 프라다 캐시미어 코트가 1만 달러, 마르지엘라 면 혼방 카디건이 1690달러에 달하는 상황에서 절반 이하 가격으로 유사한 품질을 제공한다는 인식이 형성되며 ‘합리적 럭셔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무엇이 이 브랜드들을 특별하게 만드는가
NYT는 이 브랜드들의 공통점으로 소재와 제조 철학에 대한 집착을 꼽았다.
오라리 봄버 재킷은 겉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만지는 순간 실크임을 알게 된다. A.프레세는 빈티지 의류에서 영감을 얻되 100년간 축적된 디자인 개선을 반영해 새 옷으로 재현한다.
요코 사카모토는 감 타닌, 황토, 먹물, 쑥, 팥 등 천연 염료를 사용한다. 케일은 가죽과 데님을 포함한 모든 제품을 자사 공장 한 곳에서 생산한다.
이 브랜드들은 트렌드를 좇지 않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오라리 디자이너 류타 이와이는 도쿄 출퇴근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는다고 밝혔다. 스스타인의 아사카와는 “트렌드나 유행하는 디자인 요소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번 완성한 디자인은 시즌이 지나도 유지한다는 점도 이 브랜드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 왜 지금인가
NYT는 이 현상의 배경으로 세 가지 흐름이 맞물렸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명품 가격의 극단적 상승이다. 보테가, 발렌시아가, 더 로우 같은 브랜드들이 중산층 소비자의 접근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면서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 가격대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지만 800달러짜리 쇼어 코트는 살 수 있다”는 A.프레세 팬의 발언이 이 심리를 압축한다.
둘째는 스트리트웨어 열풍의 소멸이다. 2010년대 말을 정점으로 스트리트웨어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콰이어트 럭셔리’ 기조로 흐름이 전환됐다.
일본 브랜드들의 절제된 디자인 언어가 이 전환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뉴욕 스트리트웨어 명가 키스(Kith)의 바이어들이 소시오츠키 쇼룸을 찾았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셋째는 일본의 제조 기반이다. 미국 의류 산업이 공동화된 반면 일본은 섬유 생산부터 봉제, 후가공까지 완결된 제조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문화 비평가 W. 데이비드 마르크스는 “일본에는 섬유부터 봉제, 후가공까지 놀라운 제조 기반이 남아 있다”며 이것이 ‘메이드 인 재팬’이 품질의 동의어로 통하는 실질적 근거라고 설명했다.
◇ 서구 시장 진입 방식도 다르다
이 브랜드들은 대형 패션위크 런웨이 대신 소규모 쇼룸 방식을 택했다. A.프레세의 파리 쇼룸은 마레 지구의 좁은 골목에 볼링 레인 너비의 공간에 불과했다.
오라리는 파리 패션위크 캘린더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 쇼 자체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고 디자이너 이와이가 밝혔다.
소셜미디어 마케팅보다 입소문과 디스코드 채널 내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됐으며 밴쿠버 부티크 네이버(Neighbour)에서는 입고 즉시 품절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북미 시장을 겨냥한 현지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바이어들의 요청을 반영해 팬츠 기장을 3센티미터 늘리는 등 체형 차이를 반영한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디자이너들은 이 요청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다.
◇ 한국 패션 산업에 던지는 질문
NYT의 보도는 한국 패션 업계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은 K-패션이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왔으나 일본 브랜드들이 보여주는 방식,
즉 트렌드보다 제조 철학과 소재 완성도를 앞세우고 희소성과 입소문으로 시장을 확장하는 전략과는 결이 다르다.
일본 브랜드들은 SNS 중심의 빠른 확산보다 특정 커뮤니티 내 신뢰 축적을 우선했으며 그 결과 브랜드 수명과 가격 프리미엄을 동시에 확보했다.
한인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 현상은 낯설지 않다. 미주 한인 밀집 지역의 패션 감도 높은 소비층은 이미 일본 브랜드에 상당한 친숙도를 갖고 있으며 오라리나 코몰리 등은 한국 내에서도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 브랜드의 서구 진출 성공 방정식이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들에게 참고 모델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한국만의 다른 경로가 필요한지는 업계가 주목할 만한 질문이다.
마르크스는 NYT에 “이것은 글로벌 무대에서 일본 패션의 새로운 시대”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