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백악관 국빈만찬과 영부인의 역할

행사 열리는 만찬장 50평 불과…소규모 공연만 가능

만찬 과정 모두 영부인 권한…담당비서가 실무 지휘

초청 국가 측과 공연자 의논하지만 ‘섭외 요청’ 안해

지난 1998년 백악관 국빈만찬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클린턴 대통령 내외/김대중이희호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한국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한달도 남겨놓지 않고 블랙핑크와 레이디가가 공연을 이유로 국가안보실장 등 대통령실 외교라인이 전면 교체되면서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같은 ‘외교 대란’의 이유를 근원부터 따져보면 논란의 핵심은 대통령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 대통령실에 블랙핑크와 레이디가가의 국빈만찬 공연을 제안하고 7차례나 독촉했는지 여부로 집중된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 백악관의 국빈만찬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우선 특정 국가에 대한 국빈방문 초청이 확정되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현 제이크 설리번)은 영부인실에 초청 사실을 공문으로 알리게 된다. 영부인은 대통령과 가족들의 모든 사교 이벤트를 총괄하는 사교 비서(Social Secretary, 현 카를로스 엔졸도)를 두고 있다. 미국의 전통에 따라 백악관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는 안주인인 영부인의 권한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문이 접수되면 사교 비서는 곧바로 백악관 비서들과 협력해 만찬 초청자 명단 작성에 들어간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원하는 초청자 외에 의회와 군 지도자들이 추천하는 인사도 고려하며 초청 국가 정상 내외가 원하는 초청자 명단을 국무부에 요청한다. 국무부는 초청국가 외교 당국으로부터 명단을 받아 사교 비서에게 전달해야 한다.

국빈만찬 초청자 숫자는 200~210명 수준이다. 만찬이 주로 열리는 방은 백악관에서 가장 큰 이스트룸(east room)인데 이 방의 면적이 264평방미터(약 80평), 적정 수용인원이 200명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국빈만찬도 이스트룸에서 열렸고 200여명이 초청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열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국빈만찬에는 340여명이 초청됐는데 당시 백악관은 2개 방에 손님들을 나뉘어 앉힌 것으로 알려졌다.

사교 비서는 국빈만찬에서 공연할 음악가(공식명칭 Entertainer)를 결정하는 일도 맡는다. 공연 음악가의 선정에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취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가능하면 초청국가의 역사나 문화 등을 고려하고, 해당 국가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를 선정하기도 한다. 지난 2015년 중국 시진핑 주석을 초청한 오바마 대통령 내외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힙합가수 네요(Ne-yo)를 무대에 세웠는데 백악관은 “네요의 할머니가 중국계라는 점도 선정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난 1991년 노태우 대통령 국빈만찬에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출연진이 공연했고 1993년과 1995년 김영삼 대통령 당시에는 유명 가수 제시 노만과 라이자 미넬리가 각각 무대에 올랐다. 반면 1998년 김대중 대통령 국빈만찬에서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약하던 소프라노 홍혜경이, 2011년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한인 3자매로 구성된 ‘안 트리오’가 그해 그래미 최고상을 수상했던 자넬 모네와 함께 공연했다.

국빈만찬 공연이 주로 열리는 방은 스테이트 다이닝룸(State Dining Room)으로 면적이 가로 11m, 세로 15m, 165평방미터(50평, 1728스퀘어피트)에 불과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200여명의 참석자들은 이스트룸에서 만찬을 한뒤 이 방으로 이동해 공연을 관람했다. 이 방의 최대 수용인원은 좌석 기준 140명이며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도 협소해 소규모 공연만 가능하다. 이같은 문제 때문에 댄스그룹인 블랙핑크의 공연이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빈방문 일정상 블랙핑크 공연이 가능한 날인 26~28일 카네기홀 전 공연장은 이미 다른 아티스트 공연이 예약된 상태다.

공연 음악가는 사교 비서가 직접 섭외하며 해당 음악가의 초청과 여행일정, 공연료 및 연주곡 목록 결정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한다. 만찬 공연이 열릴 때 사교 비서가 무대 옆에서 이를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전통이다. 공연자는 무대 규모와 경비 등을 고려해 가능하면 미국내 클래식 음악가나 솔로 및 듀오 가수를 선정하며 때로는 슈퍼스타를 초청하기도 한다. 지난 1998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국빈만찬에는 엘튼 존과 스티비 원더가 협연했고 2010년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 방문 당시에는 비욘세가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백악관 공연이라는 영예 때문에 ‘헐값’에 공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부인실은 공연 음악가가 결정되면 초청 국가에 통보하며 결정에 앞서 해당 국가의 의견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영부인실이 먼저 초청 국가에서 활동하는 공연자를 지명한 뒤 상대 정부에 섭외해 달라고 요청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1998년 공연한 영국 가수 엘튼 존도 당시 힐러리 클린턴 영부인실이 직접 섭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엘튼 존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공연 요청은 거부했지만 지난해 9월 바이든 대통령 내외를 위해 백악관 야외에서 특별 공연을 가졌다. 즉, 한국 대통령실이 밝힌대로 질 바이든 여사가 먼저 블랙핑크 공연을 한국 측에 제안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7차례나 독촉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만찬 식사와 공연료 등 국빈만찬의 모든 비용은 백악관이 부담한다. 어느 정도의 예산을 사용할지는 정해진 프로토콜에 따라 영부인이 사교 비서와 상의해 결정한다. CBS뉴스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담당부서인 국무부 프로토콜 오피스(OOP)에 요청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이명박 대통령 초청 국빈만찬 비용은 20만3053.24달러였다. 비욘세가 공연한 2010년 멕시코 대통령 국빈만찬 비용은 56만3479.92달러, 2011년 중국 후진타오 주석 만찬은 41만2329.23달러의 예산이 사용됐다.

50평의 작은 공간에서 공연할 초청 국가의 댄스그룹, 그것도 전세계에서 가장 팬이 많은 높은 몸값의 걸그룹을 부르겠다는 발상을 바이든 여사와 사교 비서가 했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직접 섭외하지 않고 한국 대통령실에 공을 떠넘겼거나 공연비용을 초청국가인 한국에 부담하도록 했다면 법적 논란을 낳을 만한 사항이다. 한마디로 한국 일부 언론의 보도대로 백악관 영부인실이 한국 측에  200만~300만달러에 이르는 블랙핑크 공연료 부담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편 백악관 초청 가수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2016년 미셸 오바마 여사 이후 처음이다. 당시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 뜰에서 열린 핼러윈 파티에 래퍼이자 사회운동가인 커먼(Common)을 초청했는데 보수 진영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커먼의 초기곡들이 경찰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고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담았기 때문. 결국 커먼은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그는 변했고 현재는 존경받는 아티스트이자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운동가가 됐다”고 변호한 오바마 여사의 설득으로 파티에서 공연을 펼쳤다. 백악관 초청가수의 가사만으로도 문제가 되는 미국 정치 현실에서 블랙핑크 논란이 어디까지 번질지 관심이다.

이상연 대표기자

지난해 12월 마크롱 대통령 국빈만찬 모습/C-SPAN
스테이트 다이닝룸/Source https://www.loc.gov/pictures/item/2001698951/
Author Benjamin Henry Latrobe. Library of Congress.

엘튼 존의 백악관 국빈만찬 공연 모습/C-S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