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읽어드립니다 (▶를 클릭하세요)

뉴욕타임스 “오렌지 향과 역 사이를 걷는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는 걷는 도시다.
로마와 이슬람, 그리고 스페인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이 남부 도시에서는 이동 자체가 여행의 일부가 된다.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 도시 곳곳에 심어진 약 40000그루의 오렌지 나무, 좁은 골목 사이로 이어지는 광장과 안달루시아식 중정은 세비야를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머무르는 공간으로 만든다.
1503년 스페인 제국의 주요 항구가 되면서 축적된 부와 문화는 오늘날까지 도시의 분위기를 결정짓고 있다. 플라멩코, 타파스, 타일 장식, 마차 문화 등 전형적인 스페인의 이미지가 가장 응축된 곳이기도 하다.
뉴욕타임스(NYT) 여행 섹션은 세비야에서 보낸 36시간을 생생히 기록했다.
1. 첫째 날 오후 : 세비야의 리듬에 몸을 맞추는 시간
세비야에서는 점심이 늦다. 오후 3시가 되어야 식당이 본격적으로 살아난다. 플라사 데 라 엔카르나시온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타파스로 여행을 시작하면 도시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전통 요리에 현대적인 변형을 더한 메뉴들이 이어지고, 식사는 오래 지속된다. 세비야에서 식사는 이동 사이의 휴식이 아니라 하루의 중심이다.
식사 후에는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세비야 구시가지의 복잡한 거리 구조는 과거 무어인의 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현대 브랜드 사이로 도자기, 직물, 종교 장식용 직조물 같은 전통 공예 상점이 남아 있다. 손으로 채색한 도자기나 안달루시아 전통 모자는 여행의 기념품이라기보다 이 도시의 생활 방식 일부처럼 보인다.
저녁이 되면 세비야는 음악으로 바뀐다. 플라멩코는 공연이라기보다 감정의 표현에 가깝다. 기타와 손뼉, 발 구르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관객은 조용히 몰입한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타파스와 와인으로 이어지는 저녁이 자연스럽다. 밤이 깊어지면 피아노 바나 레트로 클럽에서 30대 이상 현지인들이 어울리며 하루가 늦게 마무리된다.
2.둘째 날 오전 : 황금시대의 흔적을 따라 걷다
아침의 세비야는 조용하다. 커피와 토스트, 혹은 초콜릿에 찍어 먹는 추로스로 하루를 시작한 뒤 미술관으로 향하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 세비야 미술관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다음으로 스페인 회화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평가된다.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무리요 등 스페인 황금시대 화가들의 작품이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공간에 전시돼 있다.
16세기와 17세기, 세비야가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였던 시기에는 유럽 각지의 예술가와 지도 제작자들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지금도 골동 지도와 판화를 다루는 작은 상점에서는 당시 세비야가 세계 도시로 인식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사벨 2세 다리를 건너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트리아나는 한때 노동자와 장인들이 살던 지역으로, 지금도 세비야 중심부보다 생활의 온도가 느껴진다. 도자기 공방과 오래된 식료품 가게, 성 안나 성당 같은 장소들이 지역의 시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강변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점심을 먹으면 과달키비르 강 너머로 보이는 세비야의 첨탑과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3. 둘째 날 오후와 밤 : 현재의 세비야
알라메다 지역의 칼레 페리아는 세비야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리다. 빈티지 상점과 작은 바, 오래된 시장이 함께 존재하며 관광객보다 지역 주민의 비율이 높다. 1990년대 아르마니 청바지나 플라멩코 의상 같은 예상치 못한 물건들이 발견되는 곳이기도 하다.
저녁에는 시장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식사가 이어진다. 레바논 요리와 안달루시아 재료가 섞인 메뉴처럼, 오늘날의 세비야는 전통과 새로운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늦은 저녁 식사는 여전히 도시의 중요한 일상이다.
4. 마지막 아침 : 세비야가 사랑받는 이유
일요일 아침, 브런치 카페에서 느긋하게 시작한 뒤 궁전으로 향하면 세비야의 정수가 드러난다. 두에냐스 궁전과 필라토스의 집은 외부에서는 단순해 보이지만 내부에는 정원과 분수, 타일 장식, 아치형 회랑이 이어진다. 안달루시아 건축의 특징인 ‘닫힌 외벽과 열린 내부’ 구조는 더위와 빛을 동시에 다루기 위한 방식이었고, 오늘날에는 세비야식 삶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세비야에서의 36시간은 많은 장소를 보는 여행이 아니다. 걷고, 쉬고, 다시 걷는 과정 속에서 도시가 천천히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일정이 아니라 리듬이 여행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