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이민사회 공동체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을 후대에 전하는 ‘사회적 책무’다.
따라서 그 과정은 치밀하고, 투명하며, 진지해야 한다. 그러나 미동남부한인회연합회 홍승원 전 회장이 추진한 ‘동남부 40년사’ 편찬 사업(본보기사 링크)은 지금까지의 경과만으로도 그 책무에서 크게 벗어난, 부끄러운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13일 열린 연합회 정기총회에서 드러난 이 사업의 실태는 “책자 발행”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졌던 무책임과 불투명, 그리고 도덕적 해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인사회 공금이 어떤 식으로 ‘쌈짓돈’처럼 사용되고,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은 채 흘러갔는지를 추적해야 하는 이유다.
◇ 역사 편찬의 기본도 무시한 ‘사유화’
무엇보다 이번 사업은 시작부터 철저히 비공개적으로, 소수에 의해 독점적으로 진행됐다.
가장 큰 문제는 역사 편찬의 기본인 편찬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명목상 편찬위원장이었던 신현태 전 회장은 “편찬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밝혔고, 감사를 맡은 손환, 신철수, 박효은, 김강식 전 회장 역시 “어떤 내용이 집필됐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대신 홍승원 전 회장은 연합회와 관련성이 희박한 3인(권영일, 홍성구, 홍순욱)에게 전체 행정과 편찬을 맡기고 3만달러가 넘는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들이 동남부 한인사회에 어떤 이해와 전문성을 갖고 있었는지, 왜 이들만 선정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았다.
◇ 인건비로 위장된 ‘내 사람 챙기기’?
공금 집행의 투명성은 비영리단체 운영의 기본이다. 그런데 회계사였던 홍승원 전 회장은 외부 인사인 홍성구 씨를 총무로 임명한 뒤 3만5000달러의 수표를 맡겼고, 홍성구씨는 이 가운데 6000달러를 자기 몫의 인건비로 가져갔다.
총무가 하는 일은 편찬 과정의 실무 전반인데, 연합회 내부의 협의 없이 외부 인사를 앉히고 백지수표를 준 셈이다. 연합회의 사업이라면 총무는 연합회 내에서 선임되고 거액의 인건비를 받지 않고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이런 배경 때문에 이번 사업은 인건비와 집필료를 ‘자기 사람들끼리 나눠가진 것 아니냐’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실제 권영일 씨는 홍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주필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특히 편찬 작업이 아니라 ‘동영상 제작’을 맡았다는 이유로 홍순욱 씨에게 1만5000달러라는 거액이 지급된 사실은 사업의 본질을 왜곡시킨 대표적 사례다. 책자를 만들겠다며 후원금을 유치하고, 결과적으로는 영상 제작에 더 많은 자금을 썼다면 이는 사전 고지 없이 ‘사업 목적’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 동영상’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책자 제작 예산으로 모은 자금을 동영상 제작에 더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14명의 전직 회장과 인사들을 단시간 인터뷰해 만든 영상에 책자 집필보다 많은 예산을 배정한 결정을 누가, 어떤 근거로 내렸는지 의문이다.
이들은 동영상 제작을 위해 13명의 전직 회장과 함께 외부 원로인사인 조중식 회장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터뷰는 대부분 30분 남짓 단순 질의응답 수준에 그쳤고 주로 회장 재임 당시의 업적을 묻는 질문 등으로 깊이 있는 대화도 없었다.
그런데도 동영상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고, 연합회조차 영상의 존재와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 연합회 역사를 정리하는 자료라면 당연히 공유돼야 하지만 촬영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상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영상 제작을 맡은 홍순욱 씨는 “이달 안에 비공개로 연합회에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왜 1년이 넘게 걸렸는지, 정당한 예산 집행이었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 좋지 않았던 과정, 결과로 덮을 수 없다
홍승원 전 회장은 부족한 제작비 1만5000달러를 사비로 충당해 연내 출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본보의 지적을 반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과로만 평가하자”는 태도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묵인하라는 주장일 뿐이다.
얼마 전 지역 한인들이 대규로 응원단을 꾸며 참여했던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멕시코전은 손흥민이 출전했는데도 두 자릿수 시청률은 커녕 1%대 충격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유는 홍명보 감독 선임과정에서 드러난 축구협회의 불투명하고 불공정한 절차 때문이었다. 과정이 공정하지 않으면 팬들은 외면하고, 공동체는 냉정하게 평가한다.
공금의 모금은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집행은 투명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내더라도 과정이 왜곡되고, 공동체의 감시와 참여 없이 이뤄진 사업은 신뢰를 받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절차는 도저히 ‘좋은 과정’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또한, 동영상과 책자 발간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도 미지수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결과물은 지금까지 투명하게 관리되지 않았고, 감수 과정 또한 생략됐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다면 어떤 결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동남부한인회연합회는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모범단체다. 이 단체가 기록한 40년의 이야기가 역사로 남으려면, 이제라도 편찬 과정의 문제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잘못된 예산 집행과 절차상의 허점을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