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

김동현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유엔기념묘지는 1955년 유엔총회서 지정한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이다.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중 유엔군 희생자 4만895명 가운데 1만1천여명이 부산유엔묘지에 묻혔다가 대부분 본국에 송환되고 현재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11개국 2311구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호주군 소속 케네스 하머스톤 대위(당시 34세)는 결혼 3주만인 1950년 7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그해 10월 낙동강전선에서 전사했다. 당시 간호장교로 일본에 체류하던 그의 아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60년만인 2010년 별세하자 평소의 소원대로 남편의 묘소인 유엔묘지에 합장됐다.

유엔묘지에는 유일하게 장군 한 분과 민간인 한국여성 한 분이 안장되어 있다. ‘전쟁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군 제2군수사령관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때 이재민 3만여명에게 천막과 음식 등 군수물자를 제공했으며, 천막교실 수업을 하던 부산대학교를 위해 장전동캠퍼스에 부지를 마련하고 건축자재와 공병부대까지 지원함으로써 전쟁물자 무단 제공사건으로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갔다.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라고 역설하여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전역 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아내 한묘숙 여사와 함께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위트컴 장군의 유언에 따라 1982년 그의 유해는 유엔묘지에 안장되었으며 2017년 그의 아내가 별세했을 때는 부산대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유엔묘지에 합장했다.

2018년 7월에는 유엔평화기념관 안에 리차드 위트컴 상설전시관이 개설되었다. 일부 참전용사들은 본국에서 여생을 보낸 뒤 “전우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유언함으로써 유해가 부산으로 운구되어 유엔묘지에 안장되는 경우가 다섯 차례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원불명으로 매장되어 있다가 후에 신원이 확인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는 영령도 있다. 검은 오석으로 된 유엔군전몰장병추모명비에는 “우리 조국에 님들의 이름을 사랑으로 새깁니다”면서 전몰자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다. 유엔기념공원에는 녹색지역과 묘역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는 ‘도흔트 수로’가 있다. 전몰용사 중 최연소인 17살의 호주 출신 도흔트(J. P. Daunt) 일병을 기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물길을 만든 것이다.

해마다 11월 11일 11시 11분에는 이곳에 추모사이렌이 울리며 전 세계가 부산을 향해 1분 간 묵념을 한다. 2007년 캐나다 참전용사인 빈센트 커트너씨의 제안으로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의 묵념이 시작된 것이다. 커트너씨는 40년만에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여 부산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고 “한국전의 참전이 내 인생의 가장 자랑스런 기여”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2019년 커트너씨에게 명예부산시민증을 드렸다. 11월 11일은 1차세계대전 종전일로서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국들은 이날을 현충일로 기념하고 있다. 유엔평화기념관이 있는 유엔문화특구는 유엔으로부터 UN명칭 사용허가를 받은 세계 유일한 곳이다.

한국은 이 묘역을 유엔에 영구 기증했으며 관련 당사국들이 공동 관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UN군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유엔평화기념관에는 상설전시관으로 UN한국전쟁관과 UN참전기념관, UN국제평화관이 있다.

기념공원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은 “이국 땅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다 간 여러 나라 천사들에게 두 손 모아 경건히 바친 작품이다”라고 정문 입구에 밝히고 있다. 김중업은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으로부터 “세계의 유엔 관련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가르침를 받은 김중업이 1950년대 말에 설계한 부산대학교 본관은 등록문화재 제64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길이가 140m나 되는 초대형 건물이지만 지형에 순응하는 곡선의 부드러운 캠퍼스가 세월에 마모되지 않고 돋보인다.

유엔묘지 조성공사를 맡았던 현대건설 정주영회장은 1951년 새해 초 각국 유엔 사절단 방문을 앞두고 묘역현장을 푸른 잔디로 덮으라는 갑작스런 주문을 받고 김해평야의 보리밭 새싹을 옮겨 심어 유엔군 당국으로부터 ‘원더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 정인영이 미군지원사령부 통역원으로 근무하면서 미8군이 발주하는 공사는 현대건설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시절이다.

뭐니뭐니 해도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2천명 정원의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에 피난민 1만4천명을 태워 최다승객 승선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고 이 배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성탄절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승선 피란민들이 오늘의 부산을 일궈낸 민초들이다. 기념관 야외에는 6.25참전 21개국과 우리나라와 일본 작가를 포함하여 모두 23개국의 조각가들이 기증한 34점의 작품을 전시한 UN조각공원도 있다. 6.25전쟁의 종전협정이 이뤄진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전 세계가 기념하고 있다.

6.25의 참전기념비는 우리나라 각지에 산재해 있지만, 부산의 번화가인 부전동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입구에 1950년 9월 23일 가장 먼저 의료지원단 174명을 파견한 스웨덴 참전비가 있다. 초대 병원장 칼 에릭 그로스 대령은 당시 부산상업고등학교 운동장에 200병상 규모의 야전병원을 설립하여 부상병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돌보면서 선진의료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스웨덴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연동으로 병원을 옮겨 6년 6개월 동안 1124명의 의료진이 200만명 이상의 환자를 돌봐주었으며 특히 BCG접종을 통해 결핵 퇴치에 많은 공헌을 했다. 부산사람들은 아직도 ‘서전(瑞典.스웨덴의 한자식 표기)병원’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스웨덴을 비롯하여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5개국의 의료지원단은 모두 부산으로 들어왔기에 태종대공원에는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중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의 스칸디나비아 3국은 1958년 폐허가 된 서울에 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국립의료원을 세우고 전국의 환자들에게 무료진료와 함께 의료기술도 전수해주었다.

과거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것으로 악명 높은 바이킹의 후예 스칸디나비아 3국이 참회의 보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들 의료진을 위한 식당 ‘스칸디나비안 클럽’은 외교관들의 고급 사교장이 되었으며, 바이킹식 음식문화인 뷔페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식당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6.25전쟁 때 목숨을 바친 세계의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남구 대연동에서 용당동까지 4.5km의 ‘평화역사의 길’이 있다. 도심 속의 휴식처로 통하는 대학문화골목을 들어서면 6.25 때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장군의 집무실이 부경대 캠퍼스 귀퉁이에 있다. 포탄을 견딜 수 있도록 벽의 두께가 70cm나 되는 돌담집은 천정이 낮아 ‘지상의 벙커’로 통했다.

부경대 워크하우스를 시작으로 김중업이 설계한 유엔기념공원, 부산박물관, 부산문화원,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유엔평화기념관, 평화공원, 유엔조각공원 등을 통해 생생한 부산의 근현대역사를 만날 수 있다.

일제가 초기에는 일반모집 형식으로 토목공사장이나 광산인부로 조선인들을 집단노동시키다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통해 본격적인 강제동원에 나섰다. 당시 한반도 안에 있던 일본군수공장만도 7천개가 넘었다. 역사관 자료에 따르면 노무동원에 7,554,764명, 군무원동원에 63,312명, 군인동원에 209,227명 등 모두 7,827,355명이 강제동원의 피해를 보았다. 1942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가 2630여만명이므로 4명 중 1명이 강제동원된 셈이다.

강제동원된 한국인 중 22%가 경상도 출신인데다 대륙침략의 교두보이자 송출장이 부산이었기에 부산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설립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201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추어 개관한 일제강제동원역사관 5층 ‘기억의 터’에는 희생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절규가 새겨져 있다.

“매월 5원씩 집으로 보낸다고 해서 월급에서 뺐는데, 집에는 한 푼도 안 갔어. 배가 고파서 취사반에 가서 누룽지 주워먹다가 매도 맞고…” 특히 4층에는 광복 일주일 후에 호카이도, 아오모리, 도후쿠 지방에 차출되었던 조선인 징용자 7천여명을 태우고 오미나토항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오던 해군수송선 우키시마호가 교토 근방의 마이즈루항에서 의문의 폭침을 당한 사건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자 조선 징용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긴급히 강제수송을 추진했으며, 원래 노선이 아닌 마이즈루에서 임시 정박하는 동안 인솔장교들은 대부분 하선했던 것이다.일본은 미점령군의 지시로 항로를 바꾸었으며 미군 기뢰의 저격을 받은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했으나, 수송선이 부산에 도착하면 일본 인솔자들이 한국인들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자폭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2001년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300만엔씩 위로금 지급판결을 받았으나 2003년 오사카고등재판소에서는 원고 패소판결이 났다. 2019년 김진홍 감독이 ‘일본은 살인자다’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했다.

역사관 옥상에는 비극의 현장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강제동원 조형물을 설치하고 솔밭쉼터 사이로 태극기 바람개비가 휘날리는 추모공원을 마련했다.

<‘재능교육’고문/전 동아일보 기자)/부산고~고대 영문학과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