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무분별한 여아 낙태를 막기 위해 마련된 ‘태아 성감별 금지법’이 1987년 제정된 지 3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헌법재판소가 28일 의료인이 임신 32주 이전에 임신부나 가족에게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한 의료법 조항에 재판관 6대3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다. 헌재 결정에 따라 해당 조항은 즉각 효력을 상실했다.
헌재가 꼽은 위헌 결정 이유는 시대 변화에 따른 ‘성평등 의식 확대’와 ‘성비 불균형의 해소’였다.
헌재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함께 양성평등의식이 상당히 자리 잡아가고 있고, 국민의 가치관 및 의식의 변화로 전통 유교사회의 영향인 남아선호사상이 확연히 쇠퇴하고 있다”고 결정 이유를 밝혔다.
특히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출산 순위별 출생성비는 모두 자연성비의 정상범위 내로서, 셋째아 이상도 자연성비의 정상범위에 도달한 2014년부터는 성별과 관련해 인위적인 개입이 있다는 뚜렷한 징표가 보이지 않는다”라고도 지적했다.
남아선호사상이 퇴색함에 따라 부모의 알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태아 성감별 금지 조항도 타당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애초 이 조항이 만들어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남아선호사상과 산아제한정책, 의료기술의 발달에 따라 여아 낙태가 무분별하게 이뤄지던 때였다.
1980년 105.3명으로 자연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약 105명)와 비슷했던 신생아 성비는 1985년 109.4명, 1990년 116.5명으로 악화했다.
특히 1990년 기준 셋째아 이상 성비는 193.7명, 넷째아 이상 성비는 209.9명까지 벌어졌다.
이에 지난 1987년 여성계·종교계의 지적에 따라 태아 생명을 보호하고 성비 불균형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출산 전 태아 성감별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제정됐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성비 불균형이 점차 해소되면서 해당 조항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에 법 제정 21년 만인 2008년 헌재가 한 차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법 개정을 거쳐 원칙적으로 전면 금지됐던 태아 성별 고지는 임신 32주가 지나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완화됐다.
하지만 임신 8개월이 지나서야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부모의 정보 접근권을 침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일뿐더러, 성감별이 별다른 제재 없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규정이라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산부인과에서는 초음파로 성감별이 가능한 임신 16주부터 “아빠를 닮겠다”거나 “분홍색 옷이 잘 어울리겠다”는 식으로 태아의 성별을 부모에게 우회적으로 알려주는 게 일반화되기도 했다.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병원을 다니는 임신부들이 임신 16주 무렵 성별만 알기 위해 다른 산부인과를 방문하거나, 맘카페에 초음파 사진을 올리고는 판독을 부탁하는 풍경도 흔했다.
반면 지난 10년간 이 법이 적용돼 고발·송치되거나 기소된 사례는 전무했다.
시대의 변화로 입법 목적이 상당 부분 달성된 데다 의료 현장에서 사실상 사문화된 만큼 조항을 남겨둘 필요성도 사라졌다고 판단한 셈이다.
실제로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대체로 이번 위헌 결정이 시대 변화를 반영한 순리적 판단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박인양 교수는 “이제는 시대상이 바뀌었고 의사 입장에서도 32주가 안 됐다고 해서 부모가 알고 싶어 하는 아이의 성별을 감추기가 난처했던 점을 고려할 때 현실적인 결정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다만 현행법률상 낙태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태아의 성감별 허용이 자칫 낙태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최안나 난임센터장은 “2019년에 헌재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 법 개정이 안 돼 임신 막달까지 모든 사유의 낙태가 불법이 아닌 상태”라며 “위헌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성감별에 의한 낙태를 막기 위한 추가적인 입법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이 보호하려 한 ‘태아의 생명권’을 두고는 재판관 사이에도 미묘한 의견차가 있었다.
소수의견을 낸 이종석·이은애·김형두 재판관은 “남아선호사상이 쇠퇴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며 “남아선호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원하는 성별로 자녀를 한 명만 낳으려는 경향이 더해지면 태아 성별에 따라 낙태가 이뤄질 개연성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거보다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낙태로부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통해 조항 자체는 남겨두되 고지 가능 시기를 앞당기는 대체 입법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수의견은 “부모가 태아의 성별을 이유로 낙태를 하더라도, 이 경우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는 성별 고지 자체가 아니므로 국가가 개입해 규제해야 할 단계는 낙태 행위가 발생하는 단계”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