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등심의 언중유골

정갑식 Fashionfood21 Ltd 대표

어느 나라든 역사 속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왕이 있다. 묘하게도 선정을 베풀기보다 악행을 일삼았거나 기행을 많이 연출했던 왕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로마의 네로 황제, 조선의 연산군, 프랑스의 루이 14세, 영국의 헨리 8세 등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별스러운 왕들이 음식과 관련해서도 여러 일화를 남겼다는 사실이다. 네로 황제는 괴팍한 성격만큼 별식에 집착했고, 루이 14세는 괴짜답게 미식에 얽힌 얘기가 많으며, 헨리 8세는 호방한 이미지에 걸맞게 다식과 폭식을 했다.

그런데 서양의 음식문화 역사를 보면 오늘날 이들의 후손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음식문화가 이 왕들의 성향과 꼭 닮았다. 이탈리아의 다양한 지중해식 음식, 프랑스의 화려한 미식, 영국의 단순 투박한 음식은 이들의 음식 취향과 판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 입이 까다로우면 그 집 아내의 음식 솜씨가 뛰어나다’는 한국의 속담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이중 투박한 영국 음식문화를 간접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헨리 8세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기다. 고기 중에서도 가장 맛있다는 소고기, 그중에서도 최고로 맛있다는 부위 등심이다.

등심은 영어로 ‘Sirloin’이다. ‘sir’와 ‘loin’이라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됐는데, 한국어로 각각 직역하면 sir는 ‘경’에 해당하는 호칭이고, loin은 소고기의 특정 부위인 ‘등심’이다. 한마디로 ‘등심경’이라고 번역되는 셈이다.

요즘은 누구에게나 사용하지만 전통적으로 영국에서 ‘sir’는 지엄한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고귀한 신분에만 허용됐다. 그렇다면 등심도 작위를 받았을까?

그렇다. 등심은 헨리 8세, 제임스 1세, 찰스 2세 등 3명의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이중 맨 처음 작위를 내린 헨리 8세의 경우는 아주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하며, 나머지 두 명의 왕은 선왕의 흉내를 낸 정도라고 치부할 수 있다.

기골이 장대했던 헨리 8세는 젊은 시절부터 활달하기 그지없는 ‘상남자’였다. 당시 왕족과 귀족이 모두 그랬겠지만, 헨리 8세도 사냥을 좋아해 휘하의 무리와 종종 사냥을 나갔다. 하루는 런던 외곽의 넓고 울창한 숲으로 사냥을 떠났는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도 우여곡절 끝에 수도원을 발견했고, 수도원에 도착한 왕 일행을 맞이한 수도원장은 허기에 지친 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이때 나온 음식이 등심이었다. 사냥을 하느라 체력을 소진하고, 길까지 잃어 헤맸으니 이들이 얼마나 시장했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때 먹은 등심이 가히 ‘꿀맛’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엄청난 양을 맛있게 먹어 치운 헨리 8세는 이 고기가 무엇인지 물었고, ‘surloin’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수도원장이 말한 surloin은 프랑스어로 ‘above the loin'(~보다 위쪽)이란 의미다. 당시 영국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영국에서 노르만 왕조를 열었던 정복왕 윌리엄 때부터 프랑스와 영국이 주군과 신하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입장에서 볼 때 영국은 아무리 잘나 봐야 ‘신하에 진배없는 속국’이란 생각이 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맞닥뜨린 사람이 거침없는 헨리 8세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헨리 8세는 왕이 된 후 끊임없이 영토 확장에 주력했고, 웨일스와 아일랜드까지 영국 땅으로 만든 당사자다.

그런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르기 한 세기 전,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치렀고, 두 왕조가 5대, 116년에 걸쳐 치른 전쟁에서 헨리 8세의 선대가 패해 많은 땅을 빼앗겼으니 헨리 8세로서는 여간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국 땅에서 활개 치는 ‘surloin’을 헨리 8세의 성격상 그냥 넘길 수 없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결론을 말하면, 헨리 8세는 ‘왕의 검’을 뽑아 들고 격식을 갖춰 등심에 좌우로 한 번씩 예를 표한 뒤 “지금부터 이 loin을 ‘Sir’라고 칭하노라” 하며 즉석에서 작위를 수여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고급 메뉴인 ‘Sirloin’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때 ‘S’는 반드시 대문자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당연지사다.

영국인은 유머를 좋아한다. 영국 신사 ‘젠틀맨’의 필수 항목 중 하나도 유머 감각이다. 그런데 이 유머에는 단순히 웃기기 위한 유머 외에 ‘뼈가 들어 있는’ 유머도 많다. 프랑스와 영국 간의 정치적, 역사적, 특히 정서적 긴장을 두고 파생된 유머가 많은데, 헨리 8세가 작위를 내린 ‘Sirloin’도 뼈가 있는 유머라고 단언한다. 말 그대로 ‘언중유골’이다.

스테이크/위키미디어 자료사진 Author Davidwb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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