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문여행] 코코 샤넬과 스칼렛 오하라

조성관 작가 

노년의 코코 샤넬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미국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매우 우려스러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노예무역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이, 영국에서 철거된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면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동상을 훼손하는 것에서부터 나는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시위 군중이 런던 중심가 팔러먼트 광장의 처칠 동상을 훼손하는 장면에서는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흑인 하녀가 오하라의 코르셋 착용을 도와주는 장면

 

이런 폭력적인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가 귀스타브 르봉(1841~1931)을 소환했다. 군중은 익명성에 숨어 무모한 행동을 자행한다는 귀스타브 르봉의 예언대로 저들은 군중으로 변질되고 있구나.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재단하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인종 차별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포스터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확산되던 초기에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려 잠시나마 일부 스트리밍 서비스에 사라지기도 했다. 1939년 제작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모든 흥행 기록을 새로 쓴 영화다.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18년이 지난 1957년이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알려진 대로 1860년대 미국 남부다. 노예제 폐지로 촉발한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미국 역사의 초창기를 압축하고 있다.

사춘기 때부터 따지면 나는 이 영화를 최소 네다섯 번 이상을 보았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미국인들이 감동한 이 영화에 대해 나는 그리 공감하지 못했다. 1860년대 미국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이리라. 그래서일까. 인종차별적 영화라는 일각의 비판도 잘 와닿지 않는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흑인 하녀가 오하라의 코르셋 착용을 도와주는 장면이 영화는, 정치‧사회적인 관점과는 별개로 몇 가지 장면을 나의 뇌리에 심어주었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흑인 하녀의 도움을 받아 코르셋을 입느라 끙끙거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영화의 메시지와는 크게 상관없는 지엽말단적인 장면일 수도 있다. 그때 나는 오랜 세월 서양 여성 의복의 중심적 역할을 하던 코르셋을 처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샤넬이 등장하기 전 서양 여성들의 전형적인 패션. 사진 샤넬사 제공

코르셋은 여성의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게 하고 가슴의 풍만함을 부각한다. 코르셋을 착용하면 여성의 가슴골이 깊어지면서 성적 매력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코르셋을 입으면 여성은 숨쉬기 힘들고 행동에 지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해준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코르셋은 옆에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입거나 벗기가 힘들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최근 나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제1편부터 정주행을 시도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리즈인 ‘망자의 함’에서 뜻밖에도 또 한 번 코르셋과 맞닥뜨렸다.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힘들게 코르셋을 입고 숨을 제대로 못 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코르셋이 가슴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졸도하기 직전이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가 코르셋의 조임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바다로 추락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약혼자인 노링턴 제독은 약혼녀가 코르셋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스칼릿 오하라(비비안 리 분)엘리자베스는 누군가 ‘고통’에 대해 언급하자 이렇게 내뱉는다.

“코르셋을 한번 입어 보고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느껴봐라.”

서양여성들이 체형보정 속옷인 코르셋을 입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알려졌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초반이 지나면서 서양여성들은 더 코르셋을 입지 않았다. 최소 400년 이상 코르셋을 착용한 것이다.

400년이면 한 왕조가 명멸하고도 남는 장구한 세월이다. 유럽 귀족의 저택에는 코르셋을 입고 나서 잠시 정신을 잃으면 쉬는 ‘졸도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 사실만 봐도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의 기절이 재미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코르셋을 입은 엄마와 이모와 할머니를 보아왔기에 코르셋을 벗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서양 여성들에게 코르셋은 오래된 관행과 관습이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에 보면 허리가 잘록한 드레스에 차양이 넓은 화려한 모자를 쓴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림으로는 아름답지만 여성에게는 고통이었다. 여성들은 누구나 입고 벗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코르셋’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관습과 관행은 무서운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발전한다. 더디더라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때로는 횡보(橫步)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퇴보(退步)하기도 한다.

샤넬이 등장하기 전 서양 여성들의 전형적인 패션. 사진 샤넬사 제공코르셋과 관련해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디자이너 코코 샤넬(1883~1971)이다. 샤넬은 패션의 혁명가로 불린다. 샤넬은 여성 패션을 관습의 우물에서 꺼내 혁신의 바다에 띄워 놓았다. 그 점에서 패션의 혁명가라는 평가는 1%도 틀린 말이 아니다.

코코 샤넬! 샤넬은 400년 이상 서양 여성을 옥죄어온 코르셋을 해방시킨 인물이다. 가슴을 조이지 않는 헐렁한 여성 상의를 디자인한 사람, 그가 샤넬이다. ‘샤넬 룩’이다.

나는 ‘파리가 사랑한 천재들’에서 가브리엘 샤넬을 포함하고 그녀를 탐구했다. 샤넬은 내가 지금까지 연구한 49명의 천재들 중 가장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에디트 피아프와 찰리 채플린도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래도 샤넬보다는 나았다. 21세기에도 샤넬보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찾기 힘들다.

어머니가 죽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려져 수녀원에서 7년간 고아 아닌 고아로 지내야 했고, 수녀원에서 나와 양장점 보조로 들어가 실밥을 뜯는 일을 배웠고, 프랑스 시골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고….

샤넬이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온 것은 1910년이다. 애인의 도움을 받아 캉봉가 21번지에 모자 가게를 열게 된다. 1910년만 해도 프랑스 파리에는 귀족문화의 전통이 완고하게 남아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세기말의 귀족문화와 살롱 문화에 대한 묘사가 깨알처럼 세세하게 그려진다. 챙이 넓고 화려한 깃털 장식 모자가 대세이던 시대에 샤넬은 깃털 장식을 없애고 챙이 좁은 단순한 디자인의 모자를 디자인했다. 이 새로운 모자에 여성들이 서서히 반응했다. 장식이 없는 단순함이 아름답고 또 편리할 수도 있구나!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터졌다. 남자들은 징집되어 동부 전선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아침 신문에는 최전선에서 날아온 전사자 명단이 실렸다. 도처에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자 파리의 여성들은 도덕과 윤리가 거추장스럽다는 집단적 자각에 이르게 된다.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 온 패션이 실은 도덕과 윤리의 갑옷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깟 관습과 인습이 무엇이란 말인가? 파리의 여성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디자이너(designer). 디자이너는 상식을 파괴하는 사람이다. 파괴(de)+상식(sign)+사람(er). 산업디자이너 김영세의 통찰이다.

샤넬은 진정한 디자이너였다. 샤넬은 여성들의 욕망을 읽었다. 샤넬에게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같은 것이 없었다. 거리낌 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었다. 코르셋이 필요 없는 헐렁한 박스형 여성 상의를 내놓았다. 치마의 길이도 대폭 줄여 발목까지 드러나게 했다. 여성 의상의 오래된 상식을 파괴한 것이다. 파리의 여성들은 ‘샤넬’을 입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새로운 패션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더이상 남성의 손을 잡지 않고도 여성들은 편하게 움직였다. 발목이 드러나자 구두가 패션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왔다.

샤넬을 탐구하면서 파리 시내의 여러 장소를 가보았다. 그중 가장 감동적인 공간이 바로 캉봉가 31번지였다. 3층 응접실은 샤넬의 사적 공간. 샤넬은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피곤하면 소파에 누웠다. 모든 것은 샤넬이 살아있던 그대로다. 샤넬이 누웠던 그 소파에 앉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칠흑의 외로움 속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 새로워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코르셋에서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 샤넬이야말로 20세기의 진정한 혁명가다.

1차 세계대전 중의 코코 샤넬. 사진 샤넬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