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거장 비비안 웨스트우드 별세

향년 81세…’순응 파괴자’·’극단의 펑크 여왕’ 등 별명

주류문화 저항·전복적 메시지로 독보적 스타일 구축

비비안 웨스트우드 생전 모습
비비안 웨스트우드 생전 모습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펑크의 여왕’, 거친 저항 문화의 아이콘으로 반세기 패션계를 호령한 영국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9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웨스트우드는 이날 런던 남부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로이터 통신과 CNN 등 외신이 웨스트우드 측의 공식 성명을 인용해 보도했다.

생전 그는 ‘펑크의 여성 제사장’, ‘극단의 여왕’으로 언론에 묘사됐으며, 마지막까지 패션 산업의 경계를 허물며 활력을 불어넣어 사랑을 받았다고 CNN은 평가했다.

첫 남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이혼한 뒤 웨스트우드는 ‘싱글맘’으로 런던 포토벨로에서 보석류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1965년 후일 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가 되는 미술학도 맬컴 맥라렌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웨스트우드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970년대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런던 킹스로드에 ‘렛 잇 록'(Let it rock)(나중에 ‘섹스'(SEX)로 변경)이란 이름의 매장을 열고 주류 문화에 대한 반항과 전복적인 메시지를 담은 패션을 선보여 파란을 일으켰다. 부분 부분 찢어지거나 금속체인, 지퍼, 닭 뼈 따위가 달린 옷을 선보였고, 특히 영국 여왕의 입술에 큰 옷핀이 달린 이미지가 프린트된 티셔츠는 널리 알려졌다.

웨스트우드는 당대를 풍미한 펑크 문화의 시각적인 문법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전기에서 “나와 맬컴 이전에는 펑크가 없었다”며 “펑크에 대해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완전한 폭발’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2014년에는 “내가 패션계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순응’이란 단어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 요소가 없다면 나에게 전혀 흥미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웨스트우드는 사회·정치적인 의견을 거침없이 밝혔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핵 군축과 반전을 옹호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타격을 주는 여러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패션쇼에 서는 모델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담은 팻말을 들게 하기도 했다.

환경운동에도 앞장선 그는 친환경 패션을 위해 “(옷을) 잘 골라라. 덜 사라”라고도 강조했다.

웨스트우드의 대변인에 따르면 유족들이 설립한 비영리법인 ‘비비안 재단’이 내년 정식 출범한다. 이 재단은 “비비안의 삶과 디자인, 행동주의 유산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지속할 것”이라고 대변인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