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싸움 LG-SK…결말이 다가온다

LG화학 ‘이미 게임 끝났다’…SK이노베이션 ‘반전 있다’

이달 23일 ITC 최종결정…결과 따라 합의도 진행될 듯

전기차 배터리를 둘러싸고 소송전을 벌이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다툼이 지난해 4월부터 1년6개월째 진행되고 있다. 국내 기업이 이렇게까지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드문 일이라는 평가다. 향방을 가를 중요한 결정이 이달 말로 예정된 가운데, 이 결과에 따라 양측의 갈등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갈등은 지난해 4월 LG화학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SK이노베이션이 2년 동안 자사 전지사업 본부의 핵심 인력 76명을 빼가 전지 사업을 집중 육성했다는 게 LG화학의 주장이다.

SK도 반격에 나섰다. 지난해 6월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주장이 근거없다고 주장하며 국내 법원에 ‘LG화학의 영업비밀을 침해한 사실이 없다’고 밝혀달라는 채무부존재 확인을 청구했다. 9월에는 ‘LG화학이 자사의 배터리 특허를 침해했다’고 ITC에 제소하기도 했다.

양측의 화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양측은 지난해 8월 말까지 화해를 위한 실무진 협상을 이어갔고, 9월에는 최고경영자(CEO)인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한 시간 남짓 만나 서로의 입장을 논의했다. 하지만 실무진 협상에서 LG화학 측은 ‘공식적인 사과와 재발 방지 서약, 일정 금액의 손해배상이 대화 시작의 전제 조건’이라 했고, SK 측은 이것이 ‘백기투항을 하라’는 굴욕과 다름없다고 판단하면서 화해가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CEO 회동 다음날인 지난해 9월17일 경찰이 SK이노베이션을 압수수색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LG화학은 자사의 영업비밀을 유출했다며 SK이노베이션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는데, 이와 관련한 수사 절차가 진행된 것이다. 압수수색 전날까지만 해도 양측은 “CEO들이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지만, 수색 이후 또다시 날선 말을 주고받으며 격화일로로 치닫았다. 이후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이 국내외에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과거 합의를 파기했다’는 소송을 제기하며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사태는 올해 2월 ITC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조기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조직적·고의적으로 광범위하게 인멸했고, 포렌식 명령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에 패소해야 한다는 LG화학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ITC의 예비 결정은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그대로 최종 결정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까지 팽팽했던 양측의 무게중심이 한 쪽으로 급격하게 쏠렸다.

SK이노베이션은 한국 법원에서 반전을 노렸다. 지난해 6월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을 상대로 ‘국내외에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과거 합의를 깼다’며 소송을 냈는데, 국내 법원이 이를 인정해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ITC의 조기 패소 판결을 근본부터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게 SK이노베이션의 노림수였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이 LG화학의 손을 들어주면서 실현되진 못했다.

특허침해 소송도 현재까진 LG화학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지난달 11일 ITC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은 ‘SK이노베이션이 증거인멸을 하고 있으니 제재해달라’는 LG화학의 요청에 찬성 의견을 냈다. ITC가 이 의견을 받아들일 경우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 침해 소송뿐만 아니라 특허침해 소송에서도 상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SK이노베이션 측은 “OUII의 의견은 SK의 반박 의견을 확인하지 못하고 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ITC가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다.

양측은 소송 중에도 꾸준히 합의를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합리적 수준의 배상금을 통해 합의할 수 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상대가 제시하는 ‘합리적 수준’에 대해선 똑같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해서다. 현재 LG화학은 수조원대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반면, SK이노베이션은 수천억원대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양측이 ‘ITC의 최종 결정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도 협상을 더디게 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ITC의 최종 결정에서 반전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ITC가 조기패소 결정을 내린 건 이번 소송의 핵심인 영업비밀 침해가 인정됐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인멸’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인멸도 지난 4월부터 전면 재검토 중이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의 미국 공장이 창출하는 수천개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가 ITC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SK이노베이션과 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은 포드·폭스바겐도 ITC에 “SK에 수입금지 명령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반면 LG화학은 ITC의 조기 패소 판결로 대세가 이미 결정됐다고 본다. 지금 진행되는 ITC의 재검토는 SK이노베이션의 이의제기에 따른 통상적인 절차일 뿐, 조기 패소가 뒤집힐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ITC의 결정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에 대해서도 ‘1916년 이후 100년이 넘도록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적은 1건도 없었다’고 선을 긋는다. 지난달 28일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이 백악관 행사에서 LG화학의 미국 내 일자리 창출 기여를 공개적으로 칭찬한 점도 좋은 신호라고 본다.

양측 모두 ‘판결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보는 만큼 오는 26일로 예정된 ITC의 최종 결정이 난 후에 이를 토대로 합의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하더라도 아직 변수는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ITC가 어떤 제한 조치를 내릴지 예측이 되지 않고, 판결에 불복해 SK가 미국 연방고등법원에 항소할 수 있으며, 공탁금을 내고 미국 행정부에 60일 동안의 리뷰를 신청하는 절차도 있다. 이 경우 양측의 합의는 더욱 미궁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