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범죄 시험대 애틀랜타 총격, 끝내 면죄부?

사건 1주일 째 입증 못해…일단 ‘악의적 살인·가중폭행’ 혐의만 발표

용의자 ‘내심’ 규명 필요해 적용 어려워…아시아계 대상은 특히 난관

“아시아계 표적됐는데 증오범죄 아니라니”…미 전역서 후폭풍 예고

애틀랜타 총격사건 용의자 로버트 에런 롱(21)에 대한 ‘증오범죄 혐의’ 적용이 사실상 물 건너가는 듯한 흐름이다.

이는 한인여성 4명을 포함, 아시아계 여성 6명이 희생당한 이번 사건을 증오범죄로 보는 여론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사법당국이 ‘현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셈이 돼 논란이 거셀 전망이다. 백인 범죄자 봐주기 논란도 불가피해 보인다.

조지아주 체로키카운티 보안관실은 현재 롱의 혐의가 악의적 살인과 가중폭행이라고 22일 밝혔다.

조지아주 형법상 악의적 살인은 ‘계획적 범행의사를 가지고 불법적으로 타인을 살해한 경우’를 말한다. 범행의사를 사전에 표현한 경우는 물론 암시(implied)할만한 경우에도 악의적 살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

현재까지는 증오범죄 혐의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롱의 혐의가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다.

체로키카운티 보안관실은 이날 수사와 증거수집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고 경찰도 범행동기를 규명하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날 보안관실 발표는 총 3건의 총격사건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영스 아시안 마사지’ 총격사건에 한정된 것이었다.

롱은 16일 체로키카운티 ‘영스 아시안 마사지’에서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애틀랜타 벅헤드 피드먼트로 이동해 오후 5시 50분께 ‘골드스파’와 ‘아로마테라피스파’에 또 총격을 가했다.

아시아계 사망자 6명 가운데 한인 4명은 스파 두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애초 수사당국이 ‘성중독’을 범행동기로 섣불리 규정하려다가 비난여론에 직면하자 뒤늦게 증오범죄 가능성을 검토하는 모습을 보인 터라 이날 보안관실 발표에 ‘증오범죄 혐의는 결국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받는다.

언론은 이번 사건을 ‘증오범죄법의 시험대’로 본다.

미국에선 1968년 인종이나 종교 등을 이유로 폭력을 가하면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연방법에 마련된 이래 47개 주에 증오범죄를 규제하는 법이 도입됐다.

문제는 증오범죄 혐의 적용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 연방수사국(FBI) 증오범죄 통계를 보면 재작년 ‘증오범죄통계법'(Hate Crime Statistics Act) 적용을 받는 법집행기관 86.1%가 자신들의 관할구역에선 증오범죄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증오범죄 혐의 적용이 어려운 이유는 ‘형법이 규제하는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만 보면 적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다른 혐의와 달리 ‘왜 나쁜 짓을 했는지’를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수사당국으로선 용의자의 내심을 ‘이례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NBC방송 법률분석가 대니 세발로스는 “전통적으로 (수사당국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면서 “누군가 은행을 털었다면 ‘은행이 털렸다’라는 사실만 관심을 둔다”라고 말했다.

그는 “증오범죄는 범행동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형법상 독특한 위치에 있다”라면서 “일반적으로 연방정부는 (해당 범행이) 연방의 이익을 침해했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개입하지 않으려 하며 (범행이 벌어진) 주에 적절한 증오범죄법이 있다면 더욱 그런다”라고 부연했다.

CNN방송은 수사당국이 연방법원에 용의자를 기소할 때 증오범죄 혐의를 적용할지 정하는 데 있어 이른바 ‘벗 포(But For)’ 기준을 사용한다는 점도 이 혐의가 잘 적용되지 않는 이유로 꼽았다.

인종과 젠더 등 증오범죄법상 규정된 이유가 아니라면 용의자가 범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야만 증오범죄 혐의로 기소한다는 것이다.

롱은 수사당국에 인종적 동기가 아닌 성중독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로 규율하기 더 어렵다고 분석된다.

앞서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8일 아시아계 대상 범행은 유독 증오범죄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 사례가 많다면서 ‘반아시아계 상징’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흑인 등 다른 인종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범행은 용의자가 이들을 증오해왔다는 점을 ‘방증’할 전형적인 범행형태가 존재하는데 아시아계 대상 범행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롱에게 증오범죄 혐의가 적용되지 않고 그의 성중독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증오범죄를 저지른 백인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주장이 비등할 수 있다.

8명의 사망자 가운데 6명이 아시아계인 상황에서 증오범죄 혐의를 적용하지 않으면 ‘아시아계 다수가 사망했는데, 아시아계를 겨냥한 범죄는 아니었다’라는 설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히 성중독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고 범행동기로도 주장되지만, 의학적으로 엄밀히 규정된 질환은 아니라는 전문가들 지적이 나오는 터라 증오범죄 혐의 미적용 시 역풍은 거셀 전망이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재작년에야 제11차 국제질병분류(ICD-11)에 ‘강박적 성행위'(compulsive sexual behavior)를 포함했다.

조지아주는 작년 여름 증오범죄법을 제정했다.

조지아주 증오범죄범은 독립적인 증오범죄를 규정하지 않는 대신 범행동기가 피해자의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국가, 성별, 성적지향, 젠더, 정신·신체장애 등이면 다른 범죄로 처벌받게 됐을 때 가중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반아시안 정서 고조와 맞물려 아시아계 겨냥 증오범죄가 급증세를 보여온 가운데 이번 참사를 계기로 증오범죄 근절을 촉구하는 시위가 미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오는 26일을 ‘행동하고 치유하는 아시아 증오 중단의 날’로 선포, 전국에서 공동행동에 나서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시아계 겨냥 증오범죄를 규탄하는 연대 움직임이 미 전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수사당국이 최종 증오범죄를 적용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 낼 경우 큰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범한인 비상대책위원들이 19일 애틀랜타 총격사건이 벌어진 골드스파를 찾아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