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문여행] 마지막이 있기에 인생은…

작가 조성관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의 주연 배우들과 주요 스태프. 마릴린 먼로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 엘리 왈라치, 시나리오작가 아서 밀러, 감독 존 휴스톤, 클라크 게이블. 이 사진은 매그넘 소속 잉게 모라스가 촬영했다.얼마 전 재팬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시리즈 성적 4대 0으로 격파하고 2020재팬시리즈를 품에 안았다. 이로써 한·미·일 3개국의 2020프로야구가 모두 막을 내렸다.

프로야구 팬들은 야구 없는 혹독한 4개월을 다시 견뎌야 한다. 코로나19로 우여곡절 끝에 열린 한·미·일 프로야구는 극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32년만에 LA 다저스 품에 안긴 2020 월드시리즈. 우승이 확정되는 마지막 순간을 리플레이로 본다.

릴린 먼로의 마지막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의 주연 배우들과 주요 스태프. 마릴린 먼로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 엘리 왈라치, 시나리오작가 아서 밀러, 감독 존 휴스톤, 클라크 게이블. 이 사진은 매그넘 소속 잉게 모라스가 촬영했다.

LA가 3대 1로 앞서는 가운데 9회초 2아웃. 아웃 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다저스의 우승. LA 투수는 유리아스, 포수는 반스. 긴박한 순간 MBC스포츠+ 송재우 해설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 순간이 모든 야구선수의 꿈이죠. 우승을 확정 짓는 마지막 투수와 포수가 되고 싶어 합니다.”

유리아스는 스트라이크를 두 개 잇달아 넣었다. 세 번째 공이 스트라이크존에 꽂혔다. LA의 우승! 순간 포수 반스가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반스는 유리아스를 향해 달려오면서 오른손으로 공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1초도 걸리지 않은 그 순간에 우승을 결정 지은 마지막 공을 황급히 ‘안전하게’ 보관하는 포수. 이 공은 ’32년만의 우승 공’으로 LA 다저스 박물관에 영구 전시될 것이다. 다저스 팬들은 이 공을 보며 6차전 그날의 드라마틱한 순간들을 흥분 속에서 떠올리게 된다.

NC다이노스의 창단 9년만의 첫우승으로 끝난 한국시리즈. 9회초 투아웃.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NC의 우승. NC 투수는 원종현, 포수는 양의지. 두산 타자는 최주환. 최주환이 헛스윙, NC 우승.

포수 양의지는 두 손을 번쩍 들며 포효했다. 그리고 마운드를 향해 뛰어갔다. 양의지의 글로브를 유심히 봤다. 양의지는 왼손에 낀 글러브를 오므린 채 원종현과 포옹을 했다. 양의지는 다른 선수들과 포옹을 할 때도 우승을 확정 지은 마지막 공을 글러브로 꼭 죄고 있었다. 이 공 역시 창원NC파크 기념관에 소중히 전시될 것이다.

◇ 그들의 처음과 끝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의 경우 대개 태어난 집과 마지막 집이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의 경우 경남 의령의 생가, 오래 산 서울 장충동 양옥집, 눈을 감은 한남동 승지원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중 일반에 공개된 곳은 의령 정곡면 생가. 워낙 오지라 가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찾아가 볼 만하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생가에 들어서는 순간 집터가 좋다는 느낌을 직감적으로 받는다.

서양에서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집에서 눈을 감은 경우 그가 지냈던 방의 시계를 생의 마지막 시간에 맞춰 놓는다. 내가 지금까지 천재를 연구하며 가본 곳 중 가장 가슴 뭉클했던 공간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마지막 집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집필실 책상. 조성관 작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즈네츠니가(街) 5번지에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3층이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공간이다. 작가로서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작가는 방 5개를 빌려 썼는데, 서재 겸 집필실은 거실과 붙어 있다.

작가는 골초였다. 가족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담배를 좋아했다. 그는 가족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 글을 썼다. 이 점에서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흡사했다. 한밤의 적요 속에서 작가는 몰입의 바다로 잠수했다. 그는 집필실에 들어가기 전 거실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흡연은 잡다한 일상을 뒤로하고 창작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모드 전환을 위한 통과의례였다.(평생 담배를 피워 본 일이 없는 나는 안타깝게도 이 기분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그가 애정한 담배 브랜드는 라페르메. 담뱃갑은 타원형. 거실 탁자에는 담배갑과 담배 다섯 개비가 놓여 있다.

작가는 1881년 1월28일 오전 8시46분에 집필실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집필실 안으로는 괴테나 푸시킨이나 디킨스의 서재처럼 들어갈 수 없다. 관람객들은 줄이 처진 문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문호의 체취를 사진으로 찍고 마음에 저장한다.

집필실은 단출하다. 책상 한쪽 벽면에는 작가의 30대 시절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책상 위에는 촛대가 두 개 있고, 양 촛대 사이에 잉크 대가 있다. 원고지와 가죽 노트 여러 권도 보인다. 이 책상에 앉아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써냈다. 창가 앞에는 멈춰진 탁상 시계가 놓여있다. 8시46분.

문호의 마지막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거실에 있었다. 투명 플라스틱 속에 들어 있는 타원형 담뱃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인다. 아버지가 눈을 감자 어린 딸은 담뱃갑에 메모를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타계한 날짜와 시간을 가리키는 탁상 시계. 조성관 작가’아빠가 1881년 1월28일 오전 8시46분에 죽었다.’

이 메모를 보는 순간, 그날 아침의 광경이 스폿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휙휙 돌아갔다. 당황, 탄식, 오열, 절망···. 눈물이 핑 돌았다.

도스토옙스키가 타계한 날짜와 시간을 가리키는 탁상 시계. 조성관 작가

◇ 아서 밀러의 마지막 사랑

천재는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세일즈맨의 죽음’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과 함께 미국이 자랑하는 3대 극작가다. 90년을 산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우리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을 기억한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1926~1962).

마릴린에게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에 이어 세 번째 남편이 아서 밀러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름다운 여자가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인 아서 밀러와 결혼했다. 부성 결핍과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마릴린. 그녀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서 밀러는 지적이면서 아버지 같은 남자였다. 아서였기에 이런 마릴린과의 결혼 생활을 5년간이나 지속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마를린은 아이를 두 번 유산한다.

아서는 아내를 위해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Misfits). 아서는 아내를 위해 모슬린 테이버라는 캐릭터를 창조했다. 아서는 영화촬영 내내 로케 현장에서 아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갈등을 겪던 두 사람은 1961년 2월 이혼한다. 아버지 같은 버팀목이 사라지자 마릴린의 정신질환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마릴린과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사진작가 잉게 모라스(1923~2002).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촬영 현장에서였다. 매그넘 소속 사진작가로 잉게는 당대의 배우, 감독,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는 마릴린과 클라크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마릴린이 사망한 6개월 뒤인 1963년 결혼한다. 아서 48세, 잉게 40세였다. 육체적으로 완숙한 나이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잉게 모라스는 로버트 카파, 카르티에 브레송 등과 활동한 사진작가다.

코네티컷주 록스베리. 조성관 작가두 사람은 아서의 코네티컷 록스베리(Roxbury) 별장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마릴린과 살았던 집이다. 두 사람은 이 집에서 남매를 낳았고, 잉게가 눈을 감은 2002년까지 39년을 함께 살았다.

2004년, 여든아홉 살의 작가는 서른네 살의 화가 아그네스 발리와 결혼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딸의 반대로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록스베리 별장에서 함께 지냈다. 마지막 작품 ‘그림 끝내기’는 아그네스를 모델로 쓴 것이다. 2005년 아서가 록스베리 집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침대에서 눈을 감을 때 아그네스와 자녀, 지인들이 극작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록스베리에 가면 아서의 마지막 별장이 그대로 있다.(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마릴린 먼로, 잉게 모라스, 아그네스 발리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저장된 곳.

왜, 아서는 록스베리 집을 그토록 좋아했을까. 록스베리를 두 번째 찾아가서야 나는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집 마당 아래쪽으로 숲이 완만한 경사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언덕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이 경치를 경험한다면 록스버리를 쉬이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서의 마지막 안식처 역시 살던 집에서 가까운 공원묘지에 있다. 마지막 집과 마지막 사랑 잉게 모라스 곁에.

록스베리 공원묘역의 아서 밀러와 잉게 모라스 묘지. 뒷쪽으로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 묘지가 보인다. 조성관 작가 1972년 12월, 아폴로 17호를 타고 마지막으로 달에 발을 내디딘 사람은 우주비행사 유진 서넌이었다. 그는 마지막 우주비행사의 의미와 관련 이런 글을 썼다.

“‘마지막’은 과거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

록스베리 공원묘역의 아서 밀러와 잉게 모라스 묘지. 뒷쪽으로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 묘지가 보인다. 조성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