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수사기관의 민낯을 드러내는 용어 ‘백인 여성 실종 신드롬’
피해자 인종에 따라 달라지는 수사 강도…구조적 불평등의 현주소
지난 1월 31일 밤, 애리조나주 투손의 한 주택에서 84세 백인 여성이 사라졌다.
NBC 간판 앵커 사바나 거스리의 어머니 낸시 거스리였다. 미국 주요 언론들은 현재도 ‘낸시 거스리 실종 31일째’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사건 발생 며칠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연방 수사기관의 전폭적 지원을 지시했다. FBI가 전국에 빌보드 캠페인을 펼쳤고 5만 달러의 보상금이 내걸렸다. 제보는 1만8000건을 넘어섰다.
같은 시기, 애틀랜타에서는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27일 풀턴카운티 법원 배심원단은 90세 한인 고 김준기씨 살해 용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담당 검사는 “재기소는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빌보드도 없었고 대통령의 트윗은 더더욱 없었다.
◇ ‘백인 여성 실종 신드롬’…학술적으로 검증된 불평등
‘백인 여성 실종 신드롬(Missing White Woman Syndrome)’은 단순한 인터넷 유행어가 아니다. 2004년 저명한 저널리스트 그웬 이필이 처음 명명한 이 개념은 이후 학술 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검증됐다.
핵심은 미디어와 수사기관이 젊고, 백인이며, 중산층 이상인 여성 피해자에게 불균형적으로 자원과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다. 2016년 연구에 따르면 피해자의 인종과 성별은 해당 사건이 뉴스 보도를 받는지 여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보도를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다.
2022년 기준 미국에서 실종 상태로 분류된 유색인종은 약 3만4000명에 달했지만, 이들의 사건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비율은 통계적으로 현저히 낮았다.
시러큐스대 캐럴 리블러 박사는 이 문제의 핵심을 이렇게 짚었다. “미디어 보도를 결정하는 것은 언론사 편집국장이 아니라 경찰”이라는 것이다. 경찰이 어떤 사건에 자원을 투입하느냐가 미디어 보도량을 결정하고, 미디어 보도량이 다시 수사 자원 투입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 로렌 조: 아시안 피해자는 더 보이지 않는다
2021년 여름, 이 신드롬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한인 로렌 조(30)씨가 6월 28일 캘리포니아주 유카밸리 사막 인근에서 실종됐다. 가족과 친구들은 소셜미디어에 실종 포스터를 올리고 전단지를 붙이며 도움을 호소했다. 수사당국은 초기부터 자발적 실종으로 분류하고 수색에 소극적이었다.
같은 해 9월, 22세 백인 여성 개비 페티토가 실종됐다. 미국 전역의 미디어가 즉각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물었다. “로렌 조는?”
페티토 사건이 전국을 뒤덮는 동안 로렌 조의 가족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왜 전국적 보도를 받는지에 대한 여러분의 좌절감을 이해한다.” 분노를 직접 표출하지도 못하는 절제된 문장이었다.
결국 로렌 조의 유해는 10월 9일 사막에서 발견됐다. 실종 103일 만이었다. 사망 원인은 끝내 ‘미상’으로 처리됐다.
유타대 켄트 오노 교수는 아시안 피해자가 특히 더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모델 마이너리티 신화’, 즉 아시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공한 소수집단이라는 편견이 아시안 피해자의 고통을 사회가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 김준기씨 사건: 모든 불리한 조건의 교차점
로렌 조 사건이 ‘아시안 피해자’의 문제를 드러냈다면, 김준기씨 사건은 거기에 ‘이민자’, ‘노인’, ‘남성’, ‘커뮤니티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조건이 겹친 경우다.
백인여성 실종 신드롬을 연구한 학자들은 미디어와 수사기관의 관심을 결정하는 변수로 인종, 성별, 나이, 사회경제적 지위, 그리고 피해자 가족의 미디어 접근성을 꼽는다.
김준기씨는 이 모든 변수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낸시 거스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앵커의 어머니였다. 딸이 카메라 앞에 서서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김준기씨의 딸들은 본보에만 연락할 수 있었다.
수사의 질도 달랐다. 낸시 거스리 사건에는 FBI와 지역 경찰이 대거 투입됐다. 김준기씨 사건에서는 기초적인 증거조차 초기 수사에서 제대로 분석되지 않았다. 핵심 참고인 조사도 기소 전에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 허점은 고스란히 재판에서 드러났고, 배심원단은 1년 5개월 걸린 사건에 1시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 미디어의 관심 수사를 만든다
이 두 사건의 차이는 단순히 수사관 개인의 성실함의 차이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미디어의 관심은 수사기관을 움직인다. 수사기관이 움직이면 증거가 확보된다. 증거가 확보되면 기소가 가능해진다. 반대로 미디어가 침묵하면 수사기관도 움직이지 않는다. 증거는 사라지고 기소는 부실해진다. 그리고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낸시 거스리 사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도, FBI가 전국 빌보드를 세운 것도 결국 미디어의 폭발적 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김준기씨 사건에서 그 관심은 처음부터 없었다.
◇ 한인 미디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이 구조적 불평등 앞에서 한인 미디어의 역할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선다.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사건을 기록하고, 수사기관이 외면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커뮤니티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공론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인 미디어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김준기씨 사건에서 본보가 수사 초기부터 단독으로 현장을 취재하고, 유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재판 과정을 추적한 것은 그 역할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한인 미디어 하나의 힘만으로는 FBI를 움직일 수 없고, 대통령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결국 이 문제는 한인 커뮤니티 전체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이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조직적으로, 얼마나 큰 목소리로 시스템에 압력을 가할 수 있는가.
낸시 거스리 사건에서 미국이 보여준 것은 미디어의 관심과 커뮤니티의 조직력이 수사의 질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그 교훈이 한인 커뮤니티에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오늘도 미국 언론은 낸시 거스리 실종 31일째를 보도하고 있다. 김준기씨가 살해된 지는 벌써 1년 5개월이 지났다. 두 사건을 다루는 온도차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을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