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헌법 ‘이중위험금지’ 원칙, 배심원 무죄 평결 순간 재기소 영구 차단
수사 미흡→부실 기소→헌법 보호 발동…피해자 유족은 구제 수단 없어
지난 27일 풀턴카운티 고등법원 배심원단은 애틀랜타의 90세 한인 고 김준기씨 살해 용의자인 자넷 윌리엄스(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배심원들의 심의 시간은 단 1시간에 그쳤다.
배심원의 평결 이후 기소를 담당했던 톰 와이트 검사는 “용의자에 대한 재기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짧게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검사의 의지 표명이 아니다. 미국 헌법이 그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중위험금지 원칙…무죄 평결은 영구적 방패
미국 수정헌법 제5조는 이중위험금지(Double Jeopardy) 원칙을 명시한다. 동일인을 같은 범죄로 두 번 형사 재판에 세울 수 없다는 이 원칙은, 국가 권력의 무제한적 기소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에 명문화된 권리다.
핵심은 형사 소송시 1심 법원에서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내리는 순간 그 보호가 즉시, 그리고 영구적으로 발동된다는 점이다. 이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더라도, 또는 수사 미흡이 사후에 밝혀지더라도 검찰은 동일 피고인을 동일 사건으로 다시 기소할 수 없다. 법원도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의 3심 제도에서 항소권은 사실상 피고인에게만 주어진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상급 법원에 항소할 수 있다. 반면 무죄 판결에 대한 검찰의 항소는 이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에 원천 봉쇄된다.
◇ 수사와 기소의 허점은 누가 책임지나
이중위험금지 원칙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 원칙이 작동하기 이전 단계, 즉 수사와 기소의 질이 문제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수사의 허점은 너무나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이었다.
사건 현장 냉장고에서 발견된 혈흔 묻은 손자국이 초기 수사에서 제대로 분석되지 않았다. 핵심 참고인 조사가 기소 전에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용의자 소지품에서는 피해자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고, 일부 증거물은 혈흔 음성 판정을 받았다. 범행 동기를 묻는 질문에 검사는 “꼭 동기가 있어야 범행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검찰이 제시한 것은 CCTV 정황 증거가 전부였다. 배심원단이 1시간 만에 무죄를 결정했다는 사실이 기소의 부실함을 말해준다.
형사 사법 시스템에서 수사 부실은 단순한 실수로 끝나지 않는다. 기소 실패로 이어지고, 무죄 평결이 나오면 헌법이 재기소를 막는다. 이번 사건은 그 연쇄작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 재수사 통한 다른 용의자 기소는 가능…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렇다면 새로운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다시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이중위험금지 원칙은 기존 용의자인 윌리엄스에게만 적용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용의자가 특정되면 그 인물을 기소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첫째, 수사 동기의 문제다. 검찰과 수사기관 입장에서 이미 한 차례 패소한 사건에 자원을 재투입할 동기를 갖기 어렵다. 미국 형사 시스템에서 검사의 기소 여부는 재량 사항이다. 승소 가능성이 낮은 사건, 이미 여론의 관심이 식은 사건에 검사가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다.
둘째, 증거 훼손의 문제다. 사건은 2024년 9월 발생해 이미 1년 5개월이 지났다. 현장 증거는 보존 기간이 지났거나 이미 처리됐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수사에서 제대로 수집되지 않은 증거를 지금 다시 찾기는 어렵다. 냉장고 혈흔 손자국처럼 초기에 놓친 증거는 영구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셋째, 윌리엄스 무죄 판결이 만든 역설이다. 배심원단이 윌리엄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것은, 법적으로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백지 상태에서 새 용의자를 찾아야 하는데 기존 수사 자료와 증거는 대부분 윌리엄스를 겨냥해 구축된 것이다. 새로운 방향으로 수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다.
넷째, 아파트 보안 환경의 문제다. 본보가 사건 초기 현장 취재에서 확인했듯 사건이 발생한 매리언 로드 아파트는 외부인 출입이 사실상 자유로운 상태였다. 주민 증언대로 누구든 따라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면 용의자 범위는 사실상 무한대다. 특정 용의자를 새로 지목하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다.
검찰이 판결 직후 추가 수사 의지를 전혀 내비치지 않은 것은 이 장벽들을 이미 계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사실상의 포기 선언이다.
◇ 유족에게 남은 법적 가능성은 민사소송 뿐
형사 절차는 종결됐지만 모든 법적 경로가 닫힌 것은 아니다.
민사 소송은 형사 판결과 별개로 진행될 수 있다. 민사에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입증’ 대신 ‘증거의 우월성(preponderance of evidence)’이라는 낮은 기준이 적용된다.
형사 무죄 판결이 민사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명한 OJ 심슨 사건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유족 입장에서 검토 가능한 민사소송의 방법은 두 갈래다. 용의자인 윌리엄스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그리고 허술한 보안 관리를 방치한 아파트 운영사 측과 건물 소유주인 애틀랜타 주택청(Atlanta Housing Authority)에 대한 시설 관리 책임 추궁이다. 특히 후자는 기자가 직접 확인한 바와 같이 당시 아파트 보안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는 점에서 책임 소재를 따질 여지가 있다.
다만 민사 소송 역시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며, 승소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 이 사건이 한인사회에 남긴 질문
배심원단은 1년 5개월 걸린 사건에 대한 해답을 1시간 만에 내놓았다. 무죄였다.
“누가, 왜, 어떻게”라는 질문은 법정에서 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이제 그 물음표는 영구미제 파일 속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형사 시스템은 피고인의 권리를 철저히 보호하도록 설계돼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 법치의 근간이다. 그러나 그 설계가 허술한 수사, 부족한 기소 준비와 결합될 때 피해자와 유족이 짊어져야 할 짐은 너무나 무겁다.
한인사회가 직시해야 할 것이 있다. 여론을 움직일 힘도, 시스템에 압력을 가할 조직도 갖기 어려운 이민자 커뮤니티 노인의 죽음은 이렇게 묻힌다. 수사는 미흡했고, 기소는 부실했고, 법은 재기소를 막는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이 한인사회의 수치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이 잔혹하게 살해됐고, 그 죽음이 법적 단죄 없이 영구 미제로 남을 처지에 놓였는데 한인사회가 이를 그냥 받아들인다면 다음 피해자는 또 같은 방식으로 잊혀질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노인의 죽음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한인 이민자가 어떻게 보호받고 있는지, 우리 커뮤니티가 스스로를 지킬 의지와 역량이 있는지를 묻는 사건이다.
본보는 이 사건을 계속 추적하고 기록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