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과 치질

약 9년 전 미국에서 연수했던 중년 회사원 A(54)씨의 에피소드다. 주말을 맞아 가족 나들이를 떠났고, 점심을 먹기 위해 꽤 유명하다는 파스타 집에 도착했다. 중학생이던 아들은 음식을 시킨 후 용변이 급하다면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10여 분이 지난 후 사건이 터졌다. 아들이 갑자기 울면서 뛰어왔고, 곧이어 화난 얼굴의 미국인이 따라와서는 아이의 아빠가 맞냐며 큰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아이가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하느라 자기가 용변이 급한데도 화장실을 제때 쓸 수가 없었다면서 아이 교육을 똑바로 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물론 아들의 얘기는 조금 달랐다. 스마트폰을 보긴 했지만, 사용 시간이 10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았을뿐더러, 노크를 들은 후에도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게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문제라면 그 음식점에 남성용 화장실이 달랑 1개뿐이었고, 때마침 그 미국인이 너무나 용변이 급했다는 게 아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요즘이라면 A씨의 설명이 조금 더 설득력을 가졌을 수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Smartphone lavatory syndrome)이라는 용어조차 나왔을 정도로 화장실에서 장시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의 실질적인 건강 위해성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이라는 표현은 호주 사우스웨일스 대학교 뱅스타운-리드컴병원(Bankstown-Lidcombe Hospital)의 외과 의사 크리스토프 버니(Christophe R. Berney) 박사가 2020년 호주과학회지(ANZ journal of surgery)에 투고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썼다.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PG)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PG) [이태호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그는 이 논문에서 미국인의 90% 이상이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1995∼2005년에 태어난 Z세대는 96%가 스마트폰 없이 화장실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인스턴트 커뮤니케이션에 중독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진단했다.

버니 박사는 이런 생활 습관이 결국 만성 변비와 치질 등의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실제 치질로 진단된 20대 여성과 인터뷰한 결과, 화장실에 갈 때마다 스트마폰을 하느라 20∼30분 이상을 머물렀던 게 치질로 이어졌을 개연성을 언급했다.

한국 전문가들은 한국의 상황이 미국이나 호주보다 더 심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송주명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화장실을 사용할 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변기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면서 “이런 행동은 결국 변비뿐만 아니라 혈액이 항문으로 심하게 쏠리게 해 치핵을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치핵은 항문 점막 주위의 돌출된 혈관 덩어리를 말한다. 항문의 질병을 뜻하는 ‘치(痔)’와 덩어리라는 의미의 ‘핵’의 합성어다. 치핵은 항문에 생기는 모든 질환을 의미하는 치질의 70~80%를 차지한다.

치핵의 약 40%는 증상이 없지만, 혈변이 있거나 혈전이 동반된 경우 통증이 있을 수 있고 항문 주변이 가렵거나 변이 속옷에 묻어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신드롬(증후군)은 의학적으로 동시에 나타나는 일련의 증상이나 병적인 상태에 동반하는 모든 징후를 일컫는다. ‘스마트폰 화장실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의료계에 등장한 걸 보면 이 증후군도 머지않아 질병의 반열에 오를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질병 예방을 위해서라도 화장실에서만큼은 잠깐이라도 세상과 단절하고 볼일만 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