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까지 대전 지역서 자란 윌리엄 보르헤스(이정원)씨
“친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존해 계신다면, 저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셨으면 하고요. 이젠 만나 저와 부모가 영혼을 치유했으면 합니다.”
1969년 1월 14일 대전 근교의 농촌에서 태어났고, 친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다가 보육원에 넘겨진 뒤 입양기관에서 1977년 2월 23일 미국으로 보내진 윌리엄 보르헤스(한국명 이정원·51) 씨의 애틋한 소망이다.
6일 그가 아동권리보장원 입양인지원센터에 보낸 친어머니를 찾는 사연에 따르면, 6살 때인 1975년 7월 대전에 있는 보육원인 성실아동원(당시 주소 충남 대덕군 회덕면 송촌리 266-5)에 맡겨졌다가 이듬해 9월 22일 홀트아동복지회에 인계됐고, 1977년 2월 23일 한국에 살던(1974∼1978년) 미국인 사업가의 가정에 입양됐다.
미혼이었던 독신주의자였던 양아버지를 따라 1978년 미국에 도착했다.
9살 때 낯선 땅 미국에 간 보르헤스 씨의 어린 시절 기억은 생생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쌀농사를 짓는 산골짜기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집은 초가지붕을 얹은 전통 한옥이었고, 전기나 수도는 없었죠. 집 앞에 우물이 있었고, 길고 날카로운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앞마당에서는 산 아래 논 쪽 방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곡식을 저장하는 항아리 2∼3개가 놓인 부엌에는 두 개의 아궁이가 있었고, 그 위에 있는 큰 솥에서는 늘 무언가가 끓고 있었던 기억도 있다. 부엌과 연결된 중앙에 가족이 잠자는 방이 있었고, 왼쪽에는 다른 방들도 있었는데, 통로에 문들은 한지로 만든 미닫이문이었다.
집 뒤에 있는 언덕에는 인공 동굴이 있어 그 안에서 친구들과 놀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미지도 또렷이 가지고 있다. 키는 작지만 강한 분으로 머리에 남아 있는 아버지는 앞마당 흙바닥에 앉아 맨손으로 삼베 밧줄을 엮었는데, 항상 그 곁을 지키며 뛰놀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를 몰고 가거나 나무 수레를 끄는 소를 타고 가는 모습이 떠올라요. 수레에는 다른 아이들도 있었는데, 저는 그들이 형제자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이 맞는다면 어머니는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날랐던 것 같습니다.”
마을에는 다리가 놓인 작은 시내가 있었는데, 다리 한쪽이 파손돼 버스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 물을 건너고 다시 건너편에서 버스를 탔던 일도 머릿속에 남아있다고 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어머니는 미혼의 품삯 바느질꾼이었고,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경제 상황이 어려워 맡겨졌다”고 기록했다.
낯선 남자에 의해 성실보육원에 맡겨진 그는 충격을 받아 이름과 나이, 출신지를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알고 있는 한국 이름과 생년월일은 확실한 정보가 아닐 수 있다.
보르헤스 씨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친부모가 저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두려웠다”며 “아내와 사랑하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는 지금, 낳아준 부모가 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