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항소법원 판사 존 리 “넘어져도 다시 도전하세요”

상원의원이 ‘아메리칸드림 상징’으로 추천한 파독 광부·간호사의 아들

“젊은이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 주고파…공정·세심한 판사될 것”

시카고 연방법원 집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존 리 판사
시카고 연방법원 집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존 리 판사

“큰 꿈을 갖고 목표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여러분도 이룰 수 있습니다. 인생은 ‘직선’으로 그릴 수 없죠.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넘어지더라도 멈추지 말고 다시 도전하세요. 삶은 놀라운 기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연방 제7 항소법원의 첫 아시아계 판사, 최초의 한국계 판사가 된 존 리(54·한국명 이지훈) 판사는 지난 19일 시카고 도심의 덕슨 연방법원 빌딩 집무실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젊은이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취임 선서 일주일만인 리 판사는 “중요한 자리에 섰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차세대 특히 젊은 법조인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매우 중요하고 뜻깊게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리 판사는 지난 12일 다이앤 사이크스 제7 항소법원장 주재로 취임 선서를 했다. 공식 취임식은 현재 준비 중이며 아직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다.

소감을 묻자 리 판사는 “무척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라며 지명자 바이든 대통령과 추천인 딕 더빈·태미 덕워스 두 일리노이 연방상원의원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그는 “대통령 지명부터 상원 인준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인준 확정 후 가족들은 안도하며 기뻐했다”며 “하지만 마무리해야 할 지방법원 일이 너무 많아 한동안 별다른 실감을 못 하고 지냈다. 아내와 둘이 오붓한 저녁 외식을 하는 것으로 축하를 대신했다”고 말했다.

리 판사의 집무실은 시카고 연방법원 21층에서 항소법원 판사들이 쓰는 26층으로 다섯층 더 올라갔다.

그는 마침 인터뷰 다음 날이 집무실 이전일이라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업무상 가장 크게 달라지는 점에 대해 리 판사는 “재판(trial)을 주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며 앞으로는 법정에서 변호인단의 변론, 검찰 진술, 증인 신문을 듣는 일이 드물어지고 법을 해석해 적용하는 심리가 더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연방 지원 판사로서 다양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새로운 영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특허 관련 분쟁은 1심 법원이 어디든 상관없이 워싱턴DC 연방 항소법원이 맡기 때문에 특허 침해 소송을 다룰 일은 없어졌다고 말했다.

리 판사가 연방법원 종신 판사에 오르기 전 시카고 대형 로펌에서 특허·지적 재산권·통상규제·반독점 관련 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점을 상기하자 “아쉬움은 없다. 다양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다”고 답했다.

그는 “공정하고(fair) 세심한(careful) 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며 사건 심리에 임할 생각”이라며 “소송 당사자들의 말을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양측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법’과 ‘사실’에 근거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 판사의 의무”라면서 “‘법은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며 각 사건에 적절한 ‘법’과 ‘선례’를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최초’ 타이틀에 대해서는 “좋은 롤모델이 되고 영감을 줄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나도 젊은 변호사 시절, 법정에서 소수계 판사를 보기만 해도 힘이 났다”며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 오른 사람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사회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면서 “변화를 끌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2012년 시카고 연방법원 판사에 취임한 존 리 판사
2012년 시카고 연방법원 판사에 취임한 존 리 판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리 판사는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 꿈꾸지 않으면 이룰 것이 없다”며 특히 이민자 가정의 젊은이들에게 “미국은 누구에게나 제한 없는 큰 기회가 열려있는 땅,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살 날이 많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운다”며 “사실 나도 크고 작은 좌절들을 겪으며 성장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회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고 조언했다.

리 판사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통해 독일에 광부로 파견한 이선구(83)씨와 간호사 이화자(80)씨의 맏아들로 독일 아헨에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무렵 외가가 있는 한국 대전으로 보내져 외할머니 손에 자라다 네 살 때 부모와 함께 시카고로 이민했다.

초기 이민생활은 쉽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집에 혼자 남겨두고 각각 신발공장과 병원으로 출근해야 하기도 했다.

이런 일화와 관련해 리 판사를 연방 판사로 추천한 더빈 상원의원은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자 미국의 이야기”라고 소개한 바 있다.

시카고 교외 도시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리 판사는 하버드대학(1989년 졸업)을 거쳐 하버드 로스쿨(1992년 졸업)을 졸업하고 법무부 환경천연자원국 소송 전담 변호사로 일했다.

이후 시카고 대형 로펌 ‘메이어 브라운’, ‘그리포 앤드 엘든’, ‘프리본 앤드 피터스’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연방 판사로 발탁됐다.

리 판사는 현재 시카고 교외도시에서 부인 준 리(51·한국명 이윤정·마취과 의사)씨와 살고 있다.

10년 전 연방 지원 판사 취임 당시 중학생이던 딸(24)은 대학원생, 초등학생이던 아들(20)은 대학생이 돼 각각 타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리 판사는 한국에서의 관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뿐이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목표를 묻자 그는 “좋은 판사가 되는 것이 변함없는 목표”라고 답했다.

시카고 연방법원 집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존 리 판사
시카고 연방법원 집무실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존 리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