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혈장 기증해 태아 생명 위협하는 레스스병 예방…향년 88세
60년간 무려 헌혈 1173회…14세 대수술 계기로 정기적 헌혈 시작
희귀한 혈장을 보유해 240만 명 이상의 신생아 생명을 구한 호주의 제임스 해리슨(James Harrison)이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금 팔의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Arm)’로 불린 그는 60년 이상 헌혈을 지속하며 총 1173번의 혈장 기증을 했다. 그의 혈액에는 항-디(Anti-D) 항체가 포함돼 있었는데, 이 항체는 태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레스스 병(Rhesus disease)’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해리슨이 헌혈을 시작한 것은 14세 때 받은 대수술이 계기가 됐다. 폐 수술을 받으며 다량의 수혈을 필요로 했던 그는 헌혈자들의 도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18세가 되자마자 정기적인 헌혈을 시작했고 이후 81세(호주에서 혈장 기증 가능한 최대 연령)까지 이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딸 트레이시 멜로우십(Tracey Mellowship)은 “아버지는 자신의 헌혈이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끼셨다”며, 본인 역시 Anti-D 항체 덕분에 건강한 출산을 경험한 사례라고 밝혔다.
레스스 병은 어머니와 태아의 혈액형이 맞지 않을 경우 태아의 적혈구가 파괴되어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1960년대 과학자들이 Anti-D 항체가 이러한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후, 희귀 항체를 보유한 기증자의 혈액이 필수적이 되었다. 하지만 해리슨만큼 꾸준히 헌혈한 사람은 없었다.
호주 적십자 혈액 서비스(Lifeblood)의 CEO 스티븐 코넬리슨(Stephen Cornelissen)은 해리슨을 기리며 “그는 놀랍도록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면부지의 아기들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누구나 나처럼 특별해질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해리슨은 호주 최고 영예인 ‘오스트레일리아 훈장 메달(Medal of the Order of Australia)’을 비롯해 다양한 상을 받았지만, 끝까지 겸손함을 유지했다.
그의 소망은 언젠가 호주에서 자신의 헌혈 기록을 넘는 사람이 나오길 바라는 것이었다.
해리슨은 지난달 17일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영면했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는 유머 감각이 넘치고 따뜻한 인품을 가진 분이었다”며,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가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그가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은 단순했지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헌혈은 아프지도 않고, 나중에 당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