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24 Jan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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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정부는 ‘명품’, 尹 정부는 ‘현금’…미국에 털린 국정원

‘수미 테리 사건’ 미국 검찰 기소장 입수…국정원 활동 ‘적나라’

FBI, 2013년부터 10여년간 중형 구형 위해 ‘슬로우 쿠킹’ 수사

수미 테리 인수인계 국정원 요원 3명 ‘좌충우돌’ 공작 드러나

본보가 17일 입수한 미국 연방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수미 테리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으로 하와이와 버지니아주에서 거주한 미국내 한국문제 전문가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테리의 한국 국정원 요원 접촉 사실을 처음 인지한 것은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3년 8월 경이다.

◇ 박근혜 정부가 처음 포섭

당시 테리는 주유엔대표부 참사관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국정원 요원 A씨와 처음 접촉해 고급 스시 식당에서 점심을 대접받고 한국에 우호적인 연설과 기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테리는 2014년 4월 권위있는 외교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에 “한반도 통일이 나쁘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하고 이에 대해 금액이 공개되지 않은 대가를 지불받았다.

테리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챈 FBI 요원들은 테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이에 응한 테리는 국정원 요원과의 접촉 사실을 질문받자 말을 더듬으며 해당 요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FBI 측은 이 자리에서 테리에게 “국정원이 한국 정책에 대한 미국측 비밀회의 내용을 요구하며 대가를 지불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국정원이 아닌 외교부가 테리를 접촉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인 2016년 12월부터로 나타났다. 당시 트럼프 당선자에 대한 네트워크가 거의 없었던 박근혜 정부는 테리에게 백악관 국가안보실(NSC) 아시아 정책 담당자로 내정된 여성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인사는 안보실 부실장으로 임명된 디나 파월(Dina Powell)로 추정된다.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외교부 주미대사관 직원은 테리에게 문자를 보내 여러차례 만남을 요청했지만 테리는 “그녀가 아직 외교문제를 논의하거나 외국 관리를 만날 준비가 돼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고 결국 이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2020년 8월 美 FBI가 포착한 수미 테리와 국정원 요원들의 식사 자리. (사진=미 연방검찰 기소장)
2020년 8월 美 FBI가 포착한 수미 테리와 국정원 요원들의 식사 자리. (사진=미 연방검찰 기소장)

◇ 문재인 정부는 1만여불 ‘명품’으로 유혹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서훈 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은 테리에게 본격적인 ‘명품’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2018년 12월 28일 국정원 요원은 미국을 방문한 서훈 국정원장과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테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리는 자신이 일하던 씽크탱크 CSIS(국제전략연구소)를 통해 미 국방부 및 국가안보 담당 고위 관리 등을 초청해 2019년 1월 15일 서훈 원장과의 비공개 만남을 주선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전직 고위 정보기관 관리는 FBI에 “씽크탱크가 외국 정보기관의 현직 수장을 초청해 이러한 자리를 만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증언했다.

국정원 요원은 이에 대한 답례로 테리에게 두차례에 걸쳐 2,845달러 상당의 돌체앤가바나 코트와 2,950달러 상당의 보테가베네타 핸드백을 선물했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이었던 2020년 8월 새로 부임한 국정원 요원은 테리에게 한국 및 미국 정부 관계자가 참석하는 온라인 세미나 개최를 요청했다. 당시 국정원은 박지원 신임원장이 취임한 직후였고 국정원이 원한 세미나의 주제는 ‘팬데믹 이후 북한경제 전망’이었다.

이에 테리는 2020년 11월30일과 12월 1일 두차례에 걸쳐 CSIS와 코리아파운데이션 주최로 세미나를 열었고 알렉스 웡 미 국무부 대북특별 부대표 등이 참석했다. 테리는 이후 국정원 요원으로부터 3,450달러 상당의 루이비통 핸드백을 선물 받았다.

◇ 尹 취임후 거액 현금 투척…3만7,000여불 제공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임명된 김규현 국정원장 체제에서 국정원은 명품 보다는 거액의 ‘현금’을 미끼로 테리를 공략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국정원은 주미대사관 명의로 1만1,000달러짜리 수표를 발급해 당시 테리가 근무하던 씽크탱크 ‘우드로우 윌슨센터’에 입금했다. 이 금액은 테리가 관리하는 ‘제한없는 선물’ 계좌에 입금돼 사실상 테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입금 한달 뒤인 6월 17일 테리는 미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주재 비공개 회의에 5명의 한국정책 전문가 가운데 한명으로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회의 내용을 외부, 특히 외국 정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지만 테리는 2장 분량의 비밀 메모를 만들어 국정원 요원에게 제공했다. 이 요원은 주미대사관 소속 관용차량 안에서 해당 메모의 사진을 찍었고 FBI는 이 사진까지 증거로 입수했다.

이어 국정원 요원은 2022년 7월 8일 연방 의회 보좌관들을 위한 이벤트 조직을 테리에 요청했다. 이 행사 비용은 국정원이 댔고 테리는 이 자리에 국정원 관계자가 참석한다는 사실을 의원 보좌관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국정원은 주미대사관 명의로 보좌관들에게 고가의 텀블러인 ‘예티(Yeti)’선물세트를 제공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이 결정된 후인 2023년 1월 10일 국정원 요원은 다시 테리에게 “미국과 핵협의 그룹(NCG)을 만들려고 하니 이를 위해 미국 내 지지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금전 제공을 약속했다. 이어 2023년 3월 28일 외교부 관계자는 테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우드로우 윌슨센터와 한국 씽크탱크(현대차-국제교류재단 한국연구센터) 공동으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행사를 주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테리는 윤 대통령 국빈방문 1주일 전인 4월 18일 우드로우 윌슨센터에서 ‘한미동맹 70주년: 과거와 미래’ 제목의 행사를 개최했고 이 행사에는 에드워드 키건 대통령 동아시아 안보특보가 키노트 스피커로 참석했다. 행사 비용 2만5,418달러는 현대차-교류재단이 댔지만 국정원은 이와는 별도로 테리의 계좌에 2만6,305달러 수표를 주미대사관 명의로 입금했다.

윤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거액의 입금이 마무리된 후 FBI는 테리를 본격적으로 심문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10년간 수집해온 증거들을 바탕으로 2023년 6월 5일 첫번째 심문을 했고 이 자리에서 테리는 대부분의 혐의를 시인했다. 테리는 심문 내내 실수를 인정했고 격앙된 목소리로 “잘못했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특히 테리는 조사과정에서 “미 중앙정보국(CIA) 분석가 직책도 한국 국정원과의 부적절한 접촉 때문에 사임했다”고 털어놓았다.

FBI가 이처럼 주요 범죄 용의자에 대해 장기간 수사를 벌이는 것을 미국에서는 ‘슬로우 쿠킹(Slow Cooking)’이라고 하는데 이 방법을 통해 중형을 구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증거를 수집하는 한편 공범들을 확인할 수 있다. FBI는 테리에 대해 통화와 문자 등에 대한 도·감청은 물론 휴민트(인간 정보원)를 통한 미행과 촬영, 감청 등 전방위적인 수사를 해왔다. 하지만 한국 국정원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주미대사관 차량을 이용하는 등 허술한 대응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