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미국서 ‘가짜뉴스’ 내면 1억불 징벌 배상?

한국 여권 징벌배상제 도입 추진…조국 ‘LA조선일보 소송’ 예고에 미 판례 관심

공인은 ‘실질적 악의’ 입증 책임…캐리커처, 패러디, 오피니언 등은 배상 힘들어

'언론의 징벌적 손해배상' 긴급 토론회
‘언론의 징벌적 손해배상’ 긴급 토론회 2월24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언론중재법 개정법률안의 쟁점 –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주제로 열린 2021 미디어 관련 법률안의 쟁점 연속기획 긴급토론회에서 토론자들이 발표하고 있다./연합뉴스

한국 여권이 허위보도로 명예를 훼손한 언론사에 실제로 받은 피해의 5배에 달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선고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punitive damages)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일각에선 ‘미국에서 가짜 뉴스를 내면 1000억 원을 배상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이 개정안을 찬성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성매매 기사에 자신의 딸을 연상케 하는 일러스트를 사용한 LA조선일보에 1억달러(약 120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소송을 미국 법원에 제기할 수 있다고 언급,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관심이 더 쏠리게 됐다.

열린민주당 '오보방지 및 허위보도 징벌적 손배제' 법안 발의
열린민주당 ‘오보방지 및 허위보도 징벌적 손배제’ 법안 발의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은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는 수정헌법 1조에 따라 언론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직접적으로 규정한 법률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신 미국 법원은 수정헌법에 따라 보호되는 언론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 ‘악의적 허위보도’에 대해선 피해자의 실질적 손해를 훨씬 넘는 징벌적 손해배상을 판례로 인정한다.

영미법 계통 국가인 미국 법원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악의를 품고 불법행위를 한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고액을 배상하게 해 불법행위의 반복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언론사의 악의적 보도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판례로 198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가해 언론사는 피해자에게 3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포함해 총 4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거츠 대 로버트 웰치 사건(Gertz vs Robert Welch) 사건이 있다.

시카고의 인권변호사 엘머 거츠가 자신에 대해 “산업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연맹의 간부로서 이 단체는 미국 정부를 폭력으로 점거하는 것을 옹호한다”고 허위 보도한 지역 언론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2심을 맡은 연방고등법원은 “해당 언론사가 명예를 훼손하는 문구를 사전에 거의 확인 해보지도 않고(주의 태만), 극우성향을 가진 작가의 글을 근거로 명예훼손적 정보를 추가로 덧붙였다(실질적 악의)”라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최종심인 연방대법원도 이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1만5000달러였던 점을 고려하면 배상액 40만달러는 적지 않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법원의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규모는 1990년대 들어서 더욱 커졌다.

1991년 텍사스주 웨이코 법원은 전 지방검찰청장이었던 빅 피젤(Vic Feazell)이 텍사스주 최대 방송사인 WFAA-TV에 대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방송사 측에  징벌적 배상금을 포함해 5800만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언론 관련 명예훼손 배상금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WFAA 방송사는 피젤이  교통 위반과 관련해 지역 변호사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시리즈로 지속 보도했으며 텍사스주 공공안전국과 연방수사국(FBI)은 이 보도를 근거로 피젤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해 기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수사가 당시 제임스 애덤스 공공안전국장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던 피젤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피젤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피젤은 WFAA가 공공수사국 및 FBI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명예를 고의로 훼손하려 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배심원들은 이를 받아들여 방송 보도에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WFAA사는 1심 판결 이후 항소하겠다고 밝혔지만 곧 피젤과 미공개 합의를 통해 사건을 마무리했다.

또한 1996년 펜실베이니아주 대법원은 “지방 검사가 경찰관 아들이 포함된 살인사건의 수사를 방해했다”고 허위 보도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에 215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선고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징벌적 손해배상 판결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소송 전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사례가 늘어났고 미국 정치권과 법조계에서 “언론자유를 위해 징벌적 배상에 제한을 둬야 한다”는 분위기가 크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주 변호사인 홍승진 법무법인 광장 미국법자문사는 연합뉴스에 “1990년대 미국 법원이 선고한 징벌적 손해배상 규모는 지금으로 치면 거의 1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이라며 “최근에는 거액의 징벌 배상액과 소송비용, 긴 소송 기간 등을 고려해 소송 전에 당사자끼리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

연방 대법원 [EPA=연합뉴스자료사진]

◇미국 법원 “언론사의 ‘실질적 악의’ 인정돼야 징벌 배상”

미국 법원의 판례를 고려해 조 전 장관 모녀가 미국에서 소송을 통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선 해당 보도에 대해 ‘주의 태만’과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인정돼야 한다.

해당 언론사가 보도 내용에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거나, 보도의 진위를 무모할 정도로 무시해 원고의 명예를 훼손할 악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원고 스스로 입증해야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 전 장관의 딸이 공적 인물(public figures)인지에 대한 판단도 관심거리다. 역사적인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 판례에 따르면 공인은 이같은 실질적 악의를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할 경우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공적 인물에는 공무원이나 정치인 등 공직자(public official) 외에도 공공의 이익과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 비즈니스 리더, 공공단체 대표, 심지어 소셜미디어 스타들도 포함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유명 범죄나 소송에 연루돼 이름이 공개된 피의자와 사건 관계자도 ‘비자발적인 공인’으로 보기 때문에 이들이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이 무죄추정의 원칙과는 상관없이 수사당국이 발표한 피의자나 용의자의 신원을 사건초기부터 그대로 공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 전 장관의 딸도 공인으로 인정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 법률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만약 조 전 장관의 딸이 사적 개인(private individual)으로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언론사가 사실 확인을 일부러 무시(negligent)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사적 개인이 언론사에 손해배상을 받는 조건은 연방법원과 각 주법원이 다르게 판단하는 터라 조 전 장관 모녀가 어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느냐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일단 연방대법원의 입장은 사적 인물 역시 거액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선 언론사의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파악된다.

연방대법원은 거츠 변호사 사건에서 “사적 인물에 대한 기준은 최소한 과실의 입증이 요구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을 구하려며 여전히 실질적 악의를 입증해야 한다”고 판단한 바 있다.

또한 조 전 장관이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조 전 장관 일가를 다룬 기사가 아니라 다른 기사에 쓰여진 그래픽이라는 점도 손해배상 소송의 고려 대상이다.

연방대법원은 1988년 ‘허슬러 매거진 대 팔웰’ 판결에서 “공적 인물은 캐리커처나 패러디, 풍자 등 일반인들이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된 내용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아무리 악의적이고 추잡하다고 하더라도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문제의 조선일보 보도는 성매매 관련 기사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 전 장관과 그의 딸을 그린 그래픽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조 전 장관 측이 미국 법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결국 조선일보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할 실질적 악의를 갖고 일부러 이 그래픽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편, 일반인들이 이 그래픽을 보고 조 전장관 부녀와 성매매를 연관시킬 수 있다는 점까지 증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상연 대표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