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부 승인’에 대한항공-아시아나 국제선 운항축소 불가피

양사 기업결합 승인 조건으로 ‘슬롯 반납·운수권 재배분’ 제시
합병후 ‘독점 구조’ 해소될 지 주목…글로벌 경쟁력 악화 우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항공기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항공기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결합 승인 조건으로 공항 슬롯(비행기 이착륙 횟수) 반납과 운수권 재배분을 잠정 결정하면서 통합 이후 탄생하게 될 초대형 항공사(메가 캐리어)의 독점이 해소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공정위는 일부 슬롯 반납과 운수권 재배분 등의 조치를 이행하는 조건으로 양사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는 내용의 기업결합심사 심사보고서를 전원회의에 상정했다고 29일 밝혔다.

공정위의 승인 조건은 사실상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운항을 축소하고, 신규 항공사의 진출을 허용하는 방안이다.

이는 신규 항공사의 운항 확대로 소비자의 선택권 저하를 최소화하면서 독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지만, 국가 항공 경쟁력 확보라는 애초의 통합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한항공-아시아나 (CG)
대한항공-아시아나 (CG) [연합뉴스TV 제공]

공정위는 노선별로 경쟁 제한성을 판단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운수권·슬롯 회수를 승인 조건으로 걸었다. 노선 특성에 따라 슬롯과 운수권을 동시에 회수하거나 하나만 회수한다.

슬롯은 공항에서 시간당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뜻한다. 항공기 이착륙 때 공항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로 항공사는 출발·도착 공항의 슬롯을 각각 확보해야만 운항을 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 기준 대한항공의 인천공항 슬롯 점유율은 24%, 아시아나항공은 16%다. 계열사 LCC(저비용항공사)인 진에어(6%), 에어부산·에어서울(3%)을 합쳐도 점유율은 50%에 미치지 못한다.

통합 항공사의 인천공항 점유율이 높지 않지만, 탑승객이 몰리는 낮 시간대의 경우 점유율이 57%까지 올라간다.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슬롯 점유율은 외항사가 93.72%를 차지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알짜 시간’ 슬롯을 반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는 외국 공항 슬롯에 대해서도 국토부와 협의해 이전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해외 공항은 항공사가 공항 당국과 협의해 슬롯을 처분하거나 확보할 수 있다.

공정위는 아울러 항공 비(非)자유화 노선에서 잔여 운수권이 없으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운수권을 회수해 LCC(저비용항공사)에 재배분할 방침이다.

운수권은 국가 간 항공 협정을 통해 각국 정부가 자국 항공사에 배분하는 운항 권리로, 외항사에는 배분할 수 없다.

인천~런던, 인천~파리 등 유럽노선, 중국노선, 동남아·일본 일부 노선 등이 항공 비자유화 노선이다. 항공 자유화 협정이 맺어진 미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운수권을 확보해야 운항이 가능하다.

운수권 현황을 보면 영국은 주 17회 운수권 중 대한항공 주 10회·아시아나항공 주 7회, 독일은 주 14회 중 대한항공 주 7회·아시아나항공 주 7회 등으로 양사가 유럽 노선 대부분의 운수권을 100% 보유하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터키, UAE, 인도, 인도네시아 노선 운수권도 모두 보유하고 있다. 김포~베이징, 김포~동경, 김포~오사카 등 중국과 일본 노선도 독점 노선으로 꼽힌다.

해당 노선의 운수권이 LCC에 재배분된다면 통합 항공사의 노선·승객 점유율이 낮아지면서 독점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대한항공은 “심사보고서를 받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뒤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정리해 공정위와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외항사·LCC 운항 안 하면 독점 방지 조건 ‘무용지물’

공정위 승인 조건인 슬롯과 운수권 회수는 신규 항공사의 운항이 전제돼야만 독점 방지 효과가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독점 노선에 외항사나 국내 LCC가 신규 운항을 계획하지 않는다면 통합 이후에도 두 항공사만 운항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LCC가 운항할 수 없는 장거리 노선 독점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인천 공항 슬롯 부족으로 운항하지 못했던 외항사가 슬롯 확보를 통해 신규 운항을 추진할 수 있지만, 이는 국토부나 공정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닌 항공사가 판단할 문제다.

LCC가 운항하지 않는 노선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슬롯만 회수할 경우 외항사 운항만 늘어나게 되고, 이는 국가 항공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글로벌 환승 허브 공항인 인천공항의 경쟁력도 떨어질 수 있다. 국적 항공사는 국가 주요 항공사를 거점으로 환승 수요를 확보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천공항 슬롯 점유율인 40%는 해외 국적 항공사의 자국 허브공항 슬롯 점유율과 비교하면 높지 않은 수준이다. 주요 항공사 자국 허브공항 슬롯 점유율은 델타항공 79%, 루프트한자 67%, 에어프랑스 49%, 에미레이트항공 68% 등이다.

공정위는 일부 노선에 대해서는 운임 인상 제한, 공급·서비스 축소 금지 등의 조치도 할 방침이다.

업계에서는 통합 항공사의 국제선 운항을 축소하면서 공급량을 유지하도록 한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항공편 운항이 줄어들면 사업량이 축소되면서 통합 항공사의 고용 유지도 어려워질 수 있다. 대한항공은 통합 이후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운항 축소는 장기적으로 고용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국적 항공사 운항 축소는 소비자 권리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부가 스스로 제한을 두면서 국가 항공 경쟁력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