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스타벅스와 ‘모비딕’

[조성관 작가의 세계인문여행]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똑같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글은 어디서 쓰세요? 집필실은 따로 있으시죠?”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뇨. 그냥 여기저기서 씁니다.”

기자와 작가를 병행할 때, 주말마다 집 근처 카페들을 전전했다. 주로 서래마을과 방배동의 카페였다. 그 카페들은 서래마을의 카페베네‧스타벅스‧탐앤탐스‧마노핀, 방배동의 콘티고다. 이중 카페베네와 콘티고에서 12년 이상 주말을 보냈다. 나의 고독을 지켜본 공간인 카페베네, 콘티고, 마노핀은 사라져버렸다.

4년 전 거처를 북한산 산동네로 옮겼다. 요즘은 집, 국회도서관, 광화문 카페를 그날 아침, 기분 내키는대로 이용한다. 나름 소박한 노마드(nomad)를 실천하는 중이다. 국회도서관은 집에서 멀긴 하지만 자료가 풍부하고 시설이 쾌적해 집중이 잘 된다.

광화문 카페는 수년간 새문안교회 옆의 투썸플레이스를 애용했다. 공간이 비교적 여유가 있어 즐겨 찾곤 했다. 그런데 최근 이곳보다 마음에 드는 공간을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가까운 ‘스타벅스 리저브(R)’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게 된 것은 커피 맛 때문이 아니다. 스타벅스 커피만을 마신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미뢰(味蕾)가 둔감해 커피 맛을 감별해 낼 줄 모른다. 단지,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각성 효과를 얻기 위해 수면에 방해되지 않을 적당량의 카페인을 섭취할 뿐이다.

내가 카페를 선택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 작업 분위기다. 인테리어와 조명,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안정적 데시벨의 소음, 노트북을 이용하기에 편리한 테이블과 의자다.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켜면 머리가 명징해지곤 한다. 문서 작업을 하는 고객들을 배려한 두 개의 길고 널찍한 테이블이 편리하다. 이 테이블에는 노트북을 사용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어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금방 냉철한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이 스타벅스 R에 갈 때마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1819~1891)을 떠올린다. 2019년은 멜빌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영미권 언론에서는 이미 멜빌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많이 다뤘다. 기사의 결론은 대개 비슷했다. ‘멜빌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됐지만, 그의 문학은 지금 더 유효하다.’

멜빌은 매우 특이한 이력의 소설가다. 181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가세가 기울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생활 전선에 내몰려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중 스무 살에 우연히 상선을 탄다. 2년 뒤에는 돈벌이가 좋은 포경선의 선원이 된다. 3년여 포경선 경험에 이어 그는 다시 미 해군에 입대해 5년간 남태평양을 누볐다.

세계문학에서 멜빌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여섯 번째 작품 ‘모비 딕'(Moby Dick) 때문이다. ‘모비딕’은 고래잡이 전성기이던 19세기 포경선을 배경으로 다룬 소설이다. 고래·포경선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이 소설에는 풍부한 고래잡이 지식이 펼쳐진다. 포경밧줄, 작살던지기, 작살걸이, 고래해체 작업, 고래고기 요리…. 상상조차 힘든 이야기들이 생동감 넘치게 묘사된다. ‘모비딕’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흰색 향유고래 이름이다. 이 소설이 처음 한국에 번역되었을 때 ‘백경'(白鯨)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주인공은 백인 선장 에이해브(Ahab). 40년 넘게 포경선을 탄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잡으려다 한쪽 다리를 잃었다.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한 채 지팡이를 집고 다니는 에이해브는 모비딕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얼굴은 음울하고 눈빛은 광기(狂氣)로 이글거린다. 포경선 피쿼드호 선원들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모비 딕 사냥에만 눈이 벌겋다. 결국 에이해브는 대양에서 모비딕을 만나 사투를 벌이고, 그 셋째 날 고래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소설의 화자(話者)인 ‘나’를 제외한 전원이 수장(水葬)된다.

주인공 에이해브 옆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사람이 1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이다. 스타벅은 선장과 달리 냉철한 사람이다.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 선장의 편집광적인 광기에 맞서 언제나 지혜롭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대조적인 성격의 두 사람은 시종 갈등 관계를 형성한다.

“나를 완전히 망가뜨려서 영원히 가련한 절름발이 느림보로 만들어 버린 게 그 망할 놈의 흰 고래지!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곶을 돌고, 조류가 소용돌이치는 노르웨이의 앞바다를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녀석을 쫓아갈 것이다.”(에이해브)

“말도 못하는 멍청한 짐승에게 복수라뇨!(…) 멍청한 짐승 때문에 격분하는 건 말이죠. 에이해브 선장님, 제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입니다.”(스타벅)

선원들은 분노를 조장하는 선장의 선동에 휩쓸려 레밍처럼 우르르 몰려다닌다. 하지만 스타벅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상실한 에이해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장실에서 에이해브로부터 모욕을 당한 스타벅이 방을 나서려다가 선장에게 말한다.

“선장님은 저를 모욕한 게 아니라 격분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니 스타벅을 조심하라는 부탁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를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조심하세요, 영감님.”(스타벅)

피쿼드 호의 비극은 오늘날 대중민주주의가 ‘포퓰리스트’ 선동가에 의해 휘둘려지는 것과 흡사하다.

스타벅스는, 알려진 것처럼 1971년 미국 항구도시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창업자 4인이 ‘모비딕’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처음에는 소설의 포경선 이름을 따 ‘피쿼드’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가 다른 동업자가 1등항해사 ‘스타벅’을 고집해 그 이름에 ‘s’를 붙여 스타벅스가 되었다.

스타벅스는 브랜드명은 물론 로고까지 지중해 해양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스타벅스의 심벌 한가운데에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찬찬히 보면 머리 위에 배를 얹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이렌'(Siren)이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매혹시켜 배를 난파시킨다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바다 미녀. 사람들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지하실이나 지하철 승강장 같은 곳으로 대피한다. 공습경보를 가리켜 우리는 ‘사이렌’이라고 부른다. 사이렌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몸을 숨기는 뱃사람들의 습성을 따라 하는 것이다.

‘모비딕’은 1956년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광기 서린 그레고리 펙의 연기가 오래 기억되는 영화다. 가수 밥 딜런은 자신에게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세 작품 가운데 하나가 ‘모비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근 ‘모비딕'(문학동네)을 번역한 시인 황유원은 ‘이 책이야말로 문학이 도달할 수 있는 무게와 깊이의 한 표본’이라고 평가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은 것처럼 카페의 스타일이 완성되는 데는 오랜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카페 경영자의 가치와 철학이 에스프레소에서부터 모든 것에 스며들어야 하나의 스타일이 비로소 완성된다. 돈벌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의 냉철한 이성을 무형(無形)의 스타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스타벅은 선장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지만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내가 존중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스타벅스 R의 내부 모습. 조성관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