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연의 미국정치 이야기 9] “바보야, 문제는 종교야” [상]

영화로도 만들어진 존 그리샴의 소설 ‘펠리컨 브리프’. 루이지애나 습지의 유전개발을 위해 2명의 연방대법관을 살해한 석유재벌과 그를 비호하는 대통령의 음모를 한 여자 법대생이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멸종위기에 놓인 갈색 펠리컨이 서식하는 습지까지 개발하기 위해 환경보호 성향이 강한 대법관 2명을 제거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연방 대법관은 대통령 위?

미국의 연방 대법관은 9명. 임기는 종신이고, 본인이 원하는 경우 사임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나 사임으로 결원이 생기면 현직 대통령이 후보자를 임명하고 연방 상원의 청문회와 표결을 거쳐 확정됩니다.

아들 부시 대통령의 당선을 확정한 플로리다주 투표 판결에서도 알 수 있듯 연방 대법원의 힘은 ‘어벤저급’ 입니다. 일반 법률적 쟁점은 물론 오바마케어 등 정치적 논란에 대해서도 ‘변경할 수 없는’ 결정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각종 선거의 합법성까지 판단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대통령보다 더 권위있는 자리입니다.

무엇보다 종신직이기 때문에 정권교체에 관계없이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화당이나 민주당 모두 대법관을 선택할 때 신중을 기합니다. 오랫동안 정파의 성향에 맞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줄 인물을 골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은 보수적인 의견을 내고, 민주당이 임명한 대법관은 진보 성향의 판결을 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연방 대법관 9명의 단체사진.

‘경악’의 2015년 6월 26일

지난 2015년 6월26일 연방 대법원은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판결을 발표합니다. 바로 동성간 결혼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치관을 존중하는 보수진영은 충격을 받았고, 백인 복음주의자(White Evangelical Christian)들은 그야말로 경악했습니다.

당시 대법관 9명 가운데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5명,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4명이었습니다. 민주당쪽 지명자 4명은 동성결혼에 합헌의견을, 공화당쪽 5명 가운데 4명은 위헌의견을 냈습니다. 그런데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합헌쪽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케네디 대법관은 이전에도 낙태와 동성애 문제 등에서 진보적인 판결을 내린 전력이 있어 공화당 보수 세력으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힌 인물입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이 소송의 원고이자 동성애자인 짐 오버게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를 했고 민주당도 즉각 환영 논평을 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판결이 자신들의 재집권 실패를 예고하는 전조가 될지는 민주당 지도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보수진영, 특히 기독교인들의 분노가 밑바닥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싫어도 대법원부터 바꿔야”

공화당은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카오스’ 상태였습니다. 아들 부시가 벌여놓은 금융위기로 치명타를 맞은뒤 오바마 재임 8년간 정체성이 모호해진데다 유색인종 인구까지 늘면서 “이러다간 영원히 집권하기 힘들겠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선명성을 내세우며 돌풍을 일으켰던 ‘티파티’도 결국 공화당 정권창출의 대안은 아니었습니다.

이 혼돈을 뚫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됩니다. 민주당원들은 비웃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우리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라는 한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선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트럼프를 중심으로 보수진영이 ‘대(大) 궐기’를 하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보수성향의 시사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번에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대법원이 진보 일색이 될 것”이라며 “트럼프가 싫어도 우리의 가치를 지켜나가자”는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트럼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10명 이상 나오고, 육성녹음된 성희롱 발언이 연일 방송됐는데도 지지율은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특히 복음주의를 포함한 범 기독교 유권자들의 트럼프 지지는 사상 최고를 기록해 반대진영으로부터 “기독교가 성범죄자를 옹호하는 종교냐”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다음회에 이어집니다.

“나는 기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niskanencente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