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연의 미국정치 이야기 15] ‘트럼프 사용법’은 민주당이 배워야

저는 미국정치를 전공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글을 쓰냐고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니 독자들과 나눌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미주 한인은 물론 한국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미국정치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겠습니다. <편집자주>

지난 2일 실시된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글렌 영킨(54)이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자 언론들은 “공화당이 ‘트럼프 사용법’을 깨달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조 바이든 후보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10%p 차이로 승리했던 ‘블루 스테이트(민주당이 우세한 주)’에서 정치 초년병인 금융인 출신의 공화 후보가 당선되자 민주당은 물론 승리한 공화당마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치 분석가들과 언론들은 일제히 “공화당이 트럼프의 대선 패배 원인을 분석해 ‘포스트 트럼프’ 시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트럼프 당’으로 낙인이 찍혀 최대 승부처인 교외지역(suburbs)의 중산층에게 외면당해 왔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트럼프와 ‘불가근 불가원’의 전략을 내세워 여러 경합지역에서 압승을 거뒀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실제 영킨 후보는 트럼프의 정책을 대부분 수용하고, 트럼프의 지지 선언까지 받았지만 트럼프를 유세에 한 번도 초청하지 않았고 본인도 트럼프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민주당 테리 매콜리프 후보와 지원 유세에 나선 조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를 수십번 거론하며 ‘공화당=트럼프’라는 공식을 유권자들에게 주입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트럼프 없는 정치판’, 공화당 승리 아닌 민주당 패배

‘트럼프 없는 정치판’에서 처음 실시된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트럼프 열렬 지지자들(MAGA)을 포용하는 한편 보수나 중도층이지만 트럼프가 싫어 민주당을 찍거나 아예 투표에 나서지 않았던 유권자들까지 흡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공화당은 그동안 공략하지 않았던 아시아계 유권자들에 대한 특별관리까지 나서며 “향후 선거에서는 한 표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조지아주 최초의 아시아태평양계 커뮤니티센터를 설립한 공화당 전국위원회(RNC)는 기자에게 보내온 자료를 통해 “아시아계 자원봉사자들의 데이터 분석을 통한 가정 방문이 존스크릭시 존 브래드베리 시장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공화당을 지지할 새로운 아시아계 유권자 등록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공화당이 ‘트럼프 사용법’을 완전히 학습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많은 변수가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대선 재출마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현재 트럼프의 재출마 가능성은 반반이지만 실제 재출마를 선언할 경우 공화당은 ‘트럼프 당’으로 돌아갈지 여부를 놓고 또다시 심각한 내홍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트럼프의 재출마는 민주당이 가장 반기는 2022년 중간선거 및 2024년 대선 시나리오입니다.

반면 트럼프가 재출마를 포기하고 ‘킹메이커’를 자임하게 된다면 민주당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민주당은 ‘트럼프가 없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증명됐듯이 순전히 ‘반 트럼프’ 정서에 편승해 당선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민주당 수뇌부들도 ‘공격 대상’이 사라진 현실에 적응할 준비가 돼있지 않습니다.

◇ 과거 패배의 역사에서 배우라

지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에 패배하고 1984년 선거에서는 완전히 참패했던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대로는 정권을 되찾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지난해 대선 직후의 공화당과 같은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 바로 ‘신 민주계(New Democrat)’입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과 앨 고어 등이 선두에 섰고 이후 빌 클린턴을 비롯한 ‘새로운 피’들이 참여하면서 신 민주계는 민주당 최대 파벌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사회적 이슈에는 진보이지만 경제와 재정, 군사 문제에는 보수’라는 것입니다. 당시 민주당내 주류였던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프락치’ 취급을 받았지만 이들은 ‘제3의 길(The Third Way)’을 통한 정권 재창출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의 중도적인 이념과 정책으로 민주당은 국민의 지지를 회복했고, 레이건 이후 당선된 민주당 대통령 3명(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과 부통령 3명(앨 고어, 조 바이든, 커말라 해리스) 모두가 신 민주계 소속입니다. 또한 척 슈머 상원의장,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이 계파 소속이며 조지아주 초선인 존 오소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층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신 민주계는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2020년 선거에서 소속 하원의원 10명이 낙선하면서 그동안 지켜왔던 민주당내 최대 계파의 위치를 상실했습니다. 20~30대를 중심으로 급진 진보 진영에 대한 지지가 늘면서 이들의 세력인 ‘진보 코커스’에 밀렸고, ‘노동자 대신 전문직을 보호하는 이념’이라는 비판이 커지면서 ‘노동자 코커스’에도 뒤지며 3위 계파로 추락한 것입니다.

◇ 지금 민주당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이 때문인지 최근 민주당이 내놓은 정책을 살펴보면 사회적 이슈는 물론 경제 및 재정, 군사 문제에서도 급진적인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복지 및 인프라 예산의 과대 편성과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 드러난 실수 등은 신 민주계 소속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원래 노선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레이건 이후 각종 정부 규제를 가장 많이 철폐한 대통령이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이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행보는 규제를 하나라도 더 늘리려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민주당 내 공화당’으로 불리며 줄기차게 경제적 보수주의를 외치는 조 맨친 상원의원은 신 민주계 소속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그들의 이념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입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는 국가입니다. 집단이 당면한 문제의 해법을 개인에서 찾으면 보수주의자, 사회구조에서 찾으면 진보주의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와 부당한 세금에 맞서 나라를 세운 미국인들의 DNA에는 정부의 간섭과 선택의 속박에 저항하는 정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 민주계는 이러한 점을 간파해 사회적으로는 선택의 자유를, 경제적으로는 정부 간섭의 최소화를 주창하면서 현대 미국정치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민주당의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요?. 리얼리티 쇼 출신 정치 신예 트럼프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으면서 4년간 반성도, 제대로 된 준비도 하지 않다가 과거 이념이라고 무시하던 신 민주계 소속 옛 정치인을 내세워 운좋게 상대편 자살골로 정권을 되찾았다고 하면 지나친 비판일까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트럼프 없는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정당은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선에 실패한 인기없는 전임자를 꺾고 당선된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0개월 만에 처참한 지지율을 보이는 이유는 ‘나이’ 때문이 아닙니다. 교외 중산층은 언제든지 공화당으로 돌아갈 준비가 돼있고, 히스패닉 유권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입니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이념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생각보다 오래 시련을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기자

지난 9월11일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20주년 기념식에 함께 한 클린턴, 오바마, 바이든 부부(왼쪽부터)./NBCNEWS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