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성연재 기자/ 호주 빅토리아주관광청·캐세이퍼시픽 취재 협조
<100년 넘은 증기기관차 ‘퍼핑 빌리’>
‘골드러시’가 만든 도시 멜버른
멜버른은 오늘날 호주를 있게 한 도시다. 호주 하면 떠오르는 도시는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시드니이고, 수도는 캔버라다. 그러나 어쩌면 멜버른에서 시작된 ‘골드러시’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호주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멜버른 인근에서 시작된 골드러시는 세계 각국 사람들을 호주로 모이게 했고, 멜버른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모닝턴 반도의 ‘페닌슐라 핫 스프링스’ 온천>
700척의 난파선 비극과 ‘호주판 타이타닉’ 전설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빅토리아주의 십이사도에서 서쪽으로 차로 3분 거리에 위치한 아드 협곡은 1878년 난파한 아드호의 극적인 스토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양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을 지나던 아드호는 좌초해 승조원을 포함한 54명 가운데 소년 1명과 소녀 1명 등 단 두 명만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절벽이 둘러싼 U자형 협곡이었다.
소년은 절벽을 타고 올라가 구조를 요청, 결국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타이타닉과 같은 러브스토리는 없었다는 후문이다. 귀족 출신인 소녀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평민 출신이었던 소년은 호주에 남았다.
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해변은 인적이 무척이나 드문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난파선 해안’으로도 불릴 만큼 많은 배들이 난파한 곳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배들이 이곳에서 난파한 것일까. 그것은 호주의 ‘골드러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스토리는 1800년대 골드러시로 되돌아간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지만, 호주에도 미국 서부와 똑같은 골드러시가 있었다. 찬란한 황금은 역설적으로 피를 부른다. 신화시대부터 부귀와 영화의 상징이었던 황금은 불행과 파멸의 씨앗으로도 묘사돼 왔다.
미 서부 골드러시 때도 황금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호주의 골드러시 때는 황금의 꿈에 젖어 배에 오른 수많은 사람이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수천 척의 배가 호주 남부 해안으로 몰려들었다.
황금을 찾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거센 남극의 파도를 헤치며 지구 반대편의 호주 해변에 도착한 이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레이트 오션 로드 인근의 거센 암초들이었다. 수많은 배들이 암초에 좌초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프린스 타운과 십이사도, 포트 캠벨에서 와남불까지 이어진 ‘난파선 해안’에는 무려 700척의 난파선이 물에 잠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난파선은 약 240척에 불과하다. 황금을 찾기 위해 떠났던 사람들의 사연은 파도와 함께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수많은 배들이 침몰한 아드 협곡>
<난파선의 닻만 남은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해변>
<아드 협곡에서 만난 가시두더지>
‘멜팅 폿’을 만든 골드러시
멜버른은 팬데믹 기간 세계 최장인 262일간 도시를 봉쇄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의문이 생겼다. 직장인들은 월급이라도 받았겠지만, 자영업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긴 팬데믹 기간을 버텼을까. 빅토리아 주정부는 자영업자들이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보조금을 지급해 줬다고 한다. 심지어 외식업체의 경우 정부에서 충분한 보조금을 받고도 음식을 배달하면서 이중으로 돈을 버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봉쇄가 계속되는 동안 많은 사람이 배달주문으로 음식을 시켜 먹었기 때문이다.
호주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빅토리아는 재원이 풍부한 곳으로 여겨진다. 조그마한 어촌동네에 불과하던 멜버른이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골드러시가 있었다. 그 근원지는 멜버른 북서쪽에 있는 발라랏이라는 동네다. 이곳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됐고,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등 세계 각지에서 황금을 찾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덕분에 멜버른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멜팅 폿’이 됐다. 시내에서 수많은 아시아 음식점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시내에서 트램을 기다리다 한 여성을 만났다. 컬러 렌즈를 낀 탓이었기도 했지만, 아시아계 여성은 외형은 아시아인이었지만 뭔가 다른 독특한 느낌을 줬다.
골드러시 기간 수많은 중국인이 빅토리아주로 넘어왔다. 1861년까지 중국인은 빅토리아주 인구의 거의 7%를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다. 금이 바닥나자 많은 중국인이 시장 정원사나 농장 일꾼 등으로 정착했다. 오늘날 멜버른의 번성에 중국인
들의 지분이 분명히 있다는 느낌이다. 리틀 부르크 거리의 차이나타운은 호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16년 기준으로 빅토리아 주의 중국계 인구는 16만 명이지만, 중국인들의 이주는 계속되고 있다.
멜버른은 연방 수도가 지금의 캔버라로 옮겨지기 전까지 1901년부터 27년 동안 호주 최대 도시이자 행정 수도로 역할을 해 왔다. 현재는 빅토리아주 인구 650만 명 가운데 멜버른에 사는 인구가 523만 명이라니 멜버른이 곧 빅토리아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멜버른 시내에서 만난 아시아계 시민>
<호주 최대 규모의 차이나타운>
미식의 도시 멜버른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다민족·다국적 음식과 음료들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미
식이라고 하면 서양식 납작한 접시에 요리가 끝없이 나오는 코스요리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그
런 미식 문화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서구의 그럴싸한 레스토랑에서 마음 편하게 식사한 기억이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 왼쪽 빵이 내 것인지, 오른쪽 물이 내 것인지를 신경 써야 한다. 수많은 포크와 나이프의 용도는 수십 년을 지난 지금도 여전히 헷갈린다
<홉튼 티룸의 인기 메뉴 가운데 하나인 무화과 파이>
<블록아케이드에는 1892년에 세워진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 홉튼 티룸이 있다.>
요리 또한 마찬가지다. 음식 본연의 맛보다는 뭔가 ‘창작성’에 더 목숨을 건 듯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장식들은 어딘지 거북하다.
그러나 멜버른에서는 그런 서양식 미식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린 미식을 만날 수 있다. 아시아계부터 이탈리아계까지 백그라운드도 다양하다. 멜버른 시내 플린더스 거리에 있는 ‘수퍼노말’(Supernormal)은 평범한 음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일깨워주는 식당이다. 도쿄, 상하이, 서울, 홍콩의 요리에 영감을 받아 호주식 건강한 음식 재료로 재탄생했다. 고전적인 요리들이 재조명되고 몇몇 인기 요리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인다.
첫 번째로 맛본 것은 신선한 굴이었다. 특유의 소스에 찍어 먹는 굴은 개당 수천 원으로 비쌌지만 매우 신선했다. ‘뉴 잉글랜드 랍스터 롤’은 빵 사이에 랍스터 맛살이 들어가 있는 음식으로, 고소한 랍스터의 맛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XO소스로 맛을 낸 ‘XO 누들 샐러드’는 칼라마리가 동양적인 소스와 잘 어울렸다. XO소스는 중국음식에 매운맛을 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하는 해산물 소스다. 동양 특유의 소스들은 마치 아시아 어느 나라의 현지 음식처럼 신선하고 생생했다. 멜버른이 가진 음식 포용성에 거듭 놀랐다.
멜버른에 있는 내내 음식으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음날 들렀던 중심부의 ‘하이어 그라운드’(Higher Ground) 또한 힙한 곳이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창고형 건물 내부는 드넓은 공간을 활용해 센스 있게 꾸며놓았다. 인스타그래머블 플레이스로 인기 높은 곳이다.
플린더스 레인 건너편에 있는 번화한 디그레이브스 거리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이곳은 멜버른 최초의 차선 도로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보행자 통로가 됐다. 파라솔 아래에서 음료와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늘 붐빈다.
<디그레이브스의 노천카페>
<디그레이브스의 노천카페>
<수퍼노말 레스토랑>
<수퍼노말 메뉴>
남반구 최대 시장 퀸 빅토리아 마켓
첫날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난 뒤 호텔에 슬리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퀸 빅토리아 마켓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거기 가면 모든 것이 있다며….
퀸 빅토리아 시장은 멜버른의 쇼핑 메카 그 이상이다. 멜버른 사람들을 위한 역사적인 랜드마크이자 관광 명소다. 시장은 1878년 3월 20일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7㏊에 달하는 방대한 면적 덕분에 남반구에서 가장 큰 야외 시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천 명의 상인들이 이국적인 호주의 과일과 야채, 그리고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수입된 고급 음식 재료, 고기, 생선, 가금류에서부터 철물, 의류, 그리고 공예품과 기념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판다.
마켓 투어에 나섰더니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캥거루와 토끼고기 등 호주 특유의 육류도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치즈류와 다양한 먹거리 시식을 마치고 나니 마치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 먹은 듯 배가 불러왔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시장 주차장이 원래 공동묘지 자리라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상당수가 이장이 되었지만, 여전히 연고 없는 9천구의 시신이 마켓 아래 묻혀 있다. 과거 골드러시 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시신이다. 이 중 상당수가 아시아계라고 한다. 가이드 덕분에 7 호주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슬리퍼를 3켤레 사서 일행과 나눠 썼다.
<퀸 빅토리아 마켓>
<치즈 시식>
<캥거루 고기를 파는 정육점>
멜버른에서 커피를 빼놓을 수 있나
멜버른은 세계적인 커피 도시 가운데 하나다. 매년 바리스타 대회 우승자가 나올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이 커피를 즐겨 마시는 도시다. 또한 커피에 있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인 바리스타들이 많이 활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수백 명의 한국인 바리스타가 활약했다고 한다. 멜버른에서는 정말 많은 커피숍에 들렀다. 멜버른의 커피숍들은 대부분 오전 7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시민들이 아침 출근과 더불어 커피를 마시기 때문이다.
멜버른 커피는 ‘블랙, 화이트, 필터’ 3가지 메뉴로 압축된다. 블랙은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것이다. 그런데 아메리카노와 같은 커피라는 이야기를 듣고 ‘롱 블랙’을 시켰던 일행들은 난감한 표정이다. 엄청나게 진하고 썼기 때문이다.
<법복 차림으로 ‘패트리샤 브루어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변호사>
물을 몇 배나 더 부어 희석해야 한국에서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될 듯했다. 화이트는 카페라테와 비슷하다. 필터는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 스페셜티 커피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패트리샤 브루어스’였다. 때마침 오전 일정을 시작한 변호사들이 법복을 입은 채 서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카페 내부에 테이블과 의자가 없었다. 바깥에 플라스틱 상자 몇 개만 놓였을 뿐이었다. 카페에서 공부하며 죽치고 앉아 있는 ‘카공족’들이 발붙일 수 없는 구조다. 양질의 커피를 뽑아 들고 마시며 걸어가거나 잠시 서서 마신 뒤 일터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패트리샤에서는 화이트를 시켜봤다. 노멀 밀크를 첨가한 이 커피는 커피를 잘 모르는 ‘커알못’인 필자의 입맛에 맞았다.
패트리샤에서 만난 일본 오사카 출신 점원 마도카는 커피를 좋아해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이 된 바리스타다. 팬데믹으로 실직한 뒤 수많은 커피숍이 있는 데 착안해 혼자 커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가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패트리샤 브루어스에서 맛본 화이트>
<퀸 빅토리아 마켓의 한 디저트카게 주인이 화이트를 건네주고 있다.>
<패트리샤 브루어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법조인들>
<퀸 빅토리아 마켓의 마켓 레인 커피>
그다음으로는 빅토리아 마켓에 있는 ‘마켓 레인 커피’를 방문했다. 호주에서 길거리 표지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좁은 형태의 길이다. 우리나라의 골목길 정도가 되겠다. 해석하면 ‘시장 골목 커피’다. 이곳의 특징은 계절에 맞는 원두를 직접 선별해 가장 좋은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만족을 느낀 것은 마켓 레인 커피 맞은편의 디저트 가게에서 마신 라테였다. ‘멜버른에서는 아무 곳을 가더라도 커피가 다 맛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