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역사칼럼] 8. 임진왜란, 콜럼버스가 일으켰다?

학창시절 역사 선생님의 역사 강의 중에 1392년, 1492년, 1592년을 강조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백년씩 터울이 있는 이 세 개의 연도가 한국 사람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으므로 그렇게 강조했을 것이다. 1392년은 조선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새로 세운 해이고, 1492년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처음 횡단한 해이며, 159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이다.

그런데 1492년 콜럼버스가 신항로를 발견한 영향으로 1592년의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말해, 1392년에 나라를 열었던 조선이 1492년에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항로의 영향을 받아 1592년의 임진왜란에 시달렸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콜럼버스는 1492년에 인도를 찾아가기 위해 스페인을 떠나 미지의 바다인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여담으로, 콜럼버스는 이곳을 죽을 때까지도 인도의 북서부로 착각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동쪽으로 항해하여 진짜로 인도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많은 탐험가가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들의 항해 목적이 처음에는 향신료 원산지를 확보하고, 또한 금을 구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 변질하기 시작했다. 원주민을 이용하거나 밀어내고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 그 목적으로 변질한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앞장서서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자,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이 식민지 경쟁에 뒤질세라 뛰어들었다. 마침 이때 개인이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총도 유럽에서 개발되었으므로, 어디서나 원주민들은 이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쉽게 제압되었다.

세월은 흘러, 일본에도 서양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은 이들로부터 재빨리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우연한 기회에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총을 사들이고 이를 본떠 조총이라는 총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를 잘 활용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라는 군벌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총을 사용하여 일본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러다 오다 노부나가는 반란으로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권력을 이어받은 사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공격

우리는 히데요시가 일본의 군벌들을 안정시키려고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으며, 그 핑계가 중국 명나라를 점령하러 가니까 길을 터주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것이 핑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중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많은 미개국들이 서양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아시아를 자기네가 점령하면 서양인들로부터 아시아 전체를 지킬 수 있다는 망상을 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결국 콜럼버스의 신항로 발견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발단이 된다고 하겠다. 지나친 비약일까? 참고로, 임진왜란 때 조선은 둘로 나뉘어 일본과 중국에 각각 점령당해 없어질 뻔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반반씩 나누어 갖자고 협상을 하던 중에 히데요시가 죽어서 일본이 물러감으로서 조선은 가까스로 망국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로부터 300년 이후에는 실제로 한반도가 일본에 먹히고 말았다. 이때도 일본이 중국을 삼키겠다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300년 전에 히데요시의 망상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다.

과거의 역사에서 깨닫는 것이 없으면 되풀이해서 고생한다. 무엇을 위해 누가 임진왜란을 일으켰는냐도 중요하겠지만, 조선이 정신 못차리고 힘을 갖추기 못한 것이 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혹시 현재에도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고, 공허한 이념이나 논리에 매달려 정신없이 살고 있지나 않은지 심각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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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 히데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