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글①] ‘반대를 위한 반대’ 한글 탄생 가로막다

[편집자주]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해 반포한 문자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기까지 많은 위기가 있었다. 양반의 반대, 일제 강점기 등 무수한 한글 말살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뉴스1은 다가오는 573돌 한글날(10월9일)을 맞아 창제 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글의 위기를 살펴보고 세계 속으로 뻗어가는 한글의 위상을 조명하는 기획연재를 마련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으며 자음 17자와 모음 11자 등 총 28자로 구성된 독창적인 글자 체계다.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함을 한탄해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지만 이 과정을 매우 은밀하게 추진했다. 한글 창제가 기득권 계층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성리학자들은 한글 창제와 보급과정에서 크게 반발했다. 이에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세조) 그리고 집현전 하급관리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으며 세조는 선왕의 유지를 이어 한글 보급에 힘썼다.

‘월인석보’ © News1 문창석 기자

◇ 천지인과 발음기관 모양 본뜬 표음문자 ‘한글’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세종대왕임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글은 글자 모양 28가지를 발음기관과 하늘, 땅, 사람 등 삼재에서 본떴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알파벳 등의 일반적 표음문자와 다르게 자음과 모음을 합쳐 음절 단위로 표기하도록 설계됐다.

한글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한글을 만든 목적과 근본 뜻, 창제원리, 역사적 의미를 비롯해 새 문자의 다양한 예들이 실려 있다.

한글은 누구나 쉽게 익혀서 읽고 쓰기 위해 제작됐다. 이에 한글은 사람의 말소리뿐만 아니라 온갖 자연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적을 수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배우기 쉽다.

한글의 자음은 발음할 때 목구멍과 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모음은 세 가지의 기본 형태를 조합했다. 가운뎃 점 ‘·'(아)는 하늘을 뜻하고 ‘ㅡ'(으)는 모양처럼 평평한 땅을 가리키고 ‘ㅣ'(이)는 사람을 나타낸다. 즉 천지인 3재가 모음자에 스며있는 것이다.

한글은 동아시아에서 기존에 사용된 문자의 장단점을 수용했다. 학계에서는 한글의 창제 배경에 대해 15세기 한자문화권의 핵심사상인 성리학에 바탕해 한자문화의 수용하기 위해 창안됐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훈민정음 복각 해례본·언해본 전통문양 능화판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들이 훈민정음 언해본이 전시되어 있다. /뉴스1

◇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

한글은 창제 때부터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 세력은 한글 창제에 기여한 집현전 학자들이 다수였다. 대표적 인물은 집현전 부제학(전임교수급) 최만리였다. 그는 훈민정음을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라고 비판했다.

최만리는 1444년 2월 20일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훈민정음을 새로 만드는 것이 중국을 섬기고 중화의 제도를 따르는 것을 거스른다고 주장하면서 몽고·서하·여진·일본·서번 등 중국 글자가 아닌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 민족임을 강조했다.

상소문에는 훈민정음이 자칫 중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어떡하겠느냐”고 걱정했다.

집현전 학자 정창손은 백성이 문자를 깨우치는 것 자체가 무용하다며 세종에게 직접 반박했다.

세종이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면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하자 정찬손은 “삼강행실을 이미 반포했지만 충신과 효자 등이 나오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질의 문제이지 (문자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들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한글이 배우기 쉽다는 점이었다. 최만리는 “27자의 언문(한글)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해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느냐”고 우려했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위로 맑고 청명한 가을하늘이 그림같은 풍경을 보이고 있다.

◇ 훈민정음 지킴이 역할 자처한 세조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부터 훈민정음과 관련한 주요한 임무를 담당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는 대군 시절에 한글 최초의 산문집 ‘석보상절’을 썼다. 이 책은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일대기를 담았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석보상절’과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월인석보’를 1459년에 펴냈다. 특히 월인석보 첫머리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담아 민중들이 쉽게 훈민정음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즉위 6년째인 1460년에 관리의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포함하도록 명했고, 성균관 과목에도 훈민정음을 넣도록 해 훈민정음을 읽고 쓰는 사람을 양성했다.

그는 1461년 집현전을 없애고 간경도감을 설치했다. 간경도감은 훈민정음으로 불경과 같은 경전을 주로 편찬했다. 이때 지은 불경 언해본들은 오늘날 한글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는 1461년 최항, 한계희 등 30여 명에게 누에고치 등 양잠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농서인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명해 일반 농민들이 양잠 생산에 관한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자료사진 © News1 신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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