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배우들이 13일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작가조합(WGA)이 이미 두 달 넘게 파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배우들까지 가세하면서 할리우드는 거의 마비될 위기에 놓여 있다.
협상 당사자인 배우·작가 단체와 영화·TV 대기업들 사이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이번 대규모 파업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 이하 배우조합)은 13일 디즈니, 디스커버리-워너, 넷플릭스, 아마존 등 대기업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영화·TV제작자연맹(AMPTP)과 계약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4일 0시부터 파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이 조합에는 미국의 배우와 방송인 16만여 명이 소속돼 있으며, 단역·스턴트 배우들부터 유명한 정상급 배우들까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배우가 망라돼 있다.
이들은 파업 지침에 따라 14일부터 영화 촬영은 물론, 이미 제작이 끝난 영화들의 홍보 행사, 각종 시상식 등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된다.
이날 영국 런던에서 열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 시사회는 미 배우조합의 파업 발표를 앞두고 일정을 1시간 앞당겼으며, 배우들이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뒤 파업에 연대하는 뜻으로 자리를 일찍 뜨기도 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 배우조합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친다”며 “할리우드 배우가 출연하는 모든 영화나 프로그램은 14일 자정부터 중단되거나 대규모로 일정을 변경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당장 영향을 받을 작품으로는 올해 가을까지 촬영이 예정돼 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작 ‘글래디에이터 2’와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속편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파트 2’, TV 대작 시리즈 ‘하우스 오브 드래곤’, ‘안도르’ 등이 꼽힌다.
저예산·독립영화의 경우에는 배우조합에 규칙 면제를 요청해 촬영을 계속할 수 있지만, 누가 파업 대열을 깨고 ‘피켓 라인’을 넘을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 “배우조합 파업 경제적 손해 40억달러” 관측도
CNN에 따르면 밀컨 연구소의 수석 전략가인 케빈 클로든은 배우조합과 작가조합의 동반 파업이 조속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경제적으로 40억달러(약 5조원) 이상의 손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클로든은 배우조합의 파업 영향이 미국뿐 아니라 다른 영어권 지역에도 직접적으로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할리우드 제작사의 스튜디오가 있거나 후반 작업을 주로 하는 지역들이 실질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지난 5월 2일 이후 작가조합의 파업 기간에는 영화와 TV 시리즈 일부가 이미 쓰인 대본으로 촬영할 수 있었지만, 배우조합의 파업은 그 규모가 큰 만큼 즉각적인 촬영 중단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사측인 AMPTP가 이번 협상 막바지에 미 연방조정화해기관(FMCS)의 중재를 요청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며 “(AMPTP 소속) 스튜디오들은 배우조합 파업의 즉각적·중기적인 영향에 대해 (작가조합 파업 때보다) 훨씬 더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AMPTP가 지난달 초 미국영화감독조합(DGA)과 계약 협상을 타결해 작가조합 파업을 고립시키려 했지만, 이번에 배우조합이 합류하면서 그런 전략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됐다고 분석했다.
◇ 동반 파업 ‘출구’ 안 보여…장기화 가능성
할리우드의 대기업들이 배우들의 파업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도 배우들의 임금·재상영분배금 인상 등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스트리밍 경쟁 심화, 산업구조 재편으로 기업들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비용 절감에 열을 올리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비용 지출을 늘리게 되는 배우들의 요구를 들어주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팬데믹 기간에 신작의 극장 개봉이 불가능해지면서 막대한 손실을 봤고, 스트리밍 위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되면서 관련 투자에 막대한 비용을 쏟게 됐다. 전통적인 TV 케이블 사업도 미디어 환경 변화로 인해 크게 위축됐고, 광고 수익 등이 급감하면서 주가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 각 기업 CEO에게 수익성 확보를 요구하는 투자자들의 압박은 날로 커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디즈니의 수장으로 복귀한 밥 아이거 최고경영자(CEO)는 비용 절감을 위해 전 세계에서 직원 7천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이를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아이거 CEO는 이날 오전 경제매체 CNBC와 인터뷰에서 “배우들의 기대치는 현실적이지 않은 수준”이라며 “그들은 이 사업이 이미 직면한 일련의 도전을 가중하고 있으며, 솔직히 이것은 파괴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업계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배우조합의 동반 파업이 “최악의 시기”에 닥쳤다면서 “전체 사업에 매우 큰 타격을 줄 것이고, 비즈니스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경제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디어 전문가인 배리 딜러는 영화·미디어 산업의 격변이 기업과 노동자 양측에 모두 고통을 안겨줬다고 뉴욕타임스(NYT)에 말했다.
딜러는 “지난 50년 동안 유지돼 온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본적인 경제학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전에는 모든 것이 5개 메이저 영화 스튜디오의 주도권 아래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넷플릭스·아마존·애플 같은 기술 회사들이 등장하고 코로나19로 인해 빠르고 혁신적인 것들이 생겨나면서 산업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