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조지아주 투자 약속 철회한 한국기업…신인도 하락 우려 ①

세계 최대 제련기업 ‘고려아연’ 자회사 1100억대 투자 갑자기 일방 철회

켐프 주지사 “전자 폐기물 제련소 지어 일자리 150여개 창출” 직접 발표

부지 공사까지 마친 개발당국에 지난해 6월  “회사 사정으로 투자 못해”

고려아연  “조지아주 및 사바나 당국과 협의해 결정…일방 철회 아니다”

한국 기업들의 미국 현지 투자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현대차 전기차 공장과 SK및 LG 그룹의 배터리 공장 건설 등이 집중되고 있는 조지아주에서 세계 최대 제련 기업인 한국 고려아연이 투자 약속을 철회해 한국의 신인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본보는 현지 탐사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를 3회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주

이그니오 제련소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사바나 채텀 매뉴팩처링 센터.

2021년 10월 12일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는 직접 발표한 성명을 통해 “전자 폐기물 재활용 기업 이그니오 홀딩스(Igneo Holdings)가 8500만달러(한화 약 1160억원)를 투자해 조지아주 사바나에 소성 용광로를 건설한다”면서 “제련소는 사바나항에 인접한 시포인트(Seapoint) 터미널에 지어지며 15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그니오 홀딩스는 자회사인 이그니오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곳에 전자 폐기물 등에서 구리와 금 등 금속을 추출하기 위한 시설을 짓고 연 9만톤 이상의 비철금속을 생산한다고 밝혔다. 또한 제련된 금속을 미국 5대 항구 중 하나인 사바나항을 통해 북미는 물론 전세계에 공급한다는 원대한 계획도 발표했다.

이에 조지아 주정부는 세금 혜택을 비롯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을 약속했고 담당 개발당국인 사바나경제개발청(SEDA)은 부지 공급과 인프라 제공 등의 실무를 맡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그니오 홀딩스와 모든 계열사들은 이 발표 9개월 뒤인 2022년 7월 한국 고려아연에 인수됐다. 고려아연은 미국 자회사인 페달포인트 홀딩스를 통해 2차례에 걸쳐 4억4042만달러(한화 약 5710억원)를 들여 이그니오 계열사 지분 100%를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아연은 당시 “전자 폐기물 처리를 통해 안정적인 비철금속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 분야 기술력을 보유한 이그니오를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고려아연에 인수된 직후 이그니오는 조지아주에서 기존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2022년 10월 건설 부지를 당초 약속했던 시포인트 터미널에서 차량으로 30분 이상 떨어진 사바나 채텀 매뉴팩처링 센터로 갑자기 변경했지만 변경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사바나항을 통해 전세계로 제련된 금속을 제공하겠다”는 약속과는 동떨어진 결정이었지만 사바나경제개발청은 변경된 부지에 대해 정비 및 인프라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023년 제련소를 완공하겠다는 당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고 완공 일자는 2025년으로 늦춰졌다. 대신 2023년 2월 대니쉬 미르(Danish Mir) 이그니오 최고경영자(CEO) 겸 창업자는 미국 재활용 전문 미디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서부 라스베이거스 인근에 소성 시설 1개를 더 짓는 등 미국 내에만 3개의 소성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추가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이그니오 제련소를 처음 지으려 했던 사바나 시포인트 터미널. 사바나항과 인접해 있다.

하지만 미르 CEO는 인터뷰 직후인 2022년 3월 돌연 사퇴했고 새로운 CEO 자리는 고려아연 호주 계열사인 선메탈(Sun Metal) 출신의 마크 포프(Mark Pope) 페달포인트 홀딩스 CEO가 겸임하게 됐다.

포프 CEO가 부임한지 3개월 만인 2023년 6월 사바나경제개발청 측은 이그니오의 결정이라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공개했다. 사바나경제개발청이 본보에 제공한 이그니오 측의 성명은 “신중한 고려와 SEDA(사바나경제개발청)와의 협의 끝에 이그네오 테크놀로지스는 입장을 재검토한 결과, 미국 동남부 지역과 사바나에 시설을 설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After careful consideration and thorough discussions with SEDA, Igneo Technologies has reviewed its position and has decided not to proceed with establishing its facility in the Southeastern United States and Savannah)”는 내용이었다.

사바나경제개발청 관계자는 “건설 철회는 이그니오의 결정”이라고 답했으며 구체적인 철회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그니오 측에 물어봐달라”고 답했다.

 

이처럼 갑작스런 철회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같은 사실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채 묻혀있다 본보의 취재로 드러났다. 지역 전문매체인 ‘사바나 아젠다(Savannah Agenda)’의 에릭 컬 발행인은 “이그니오가 갑자기 건설 부지를 기존 시포인트에서 내륙 쪽으로 변경한 이유도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다”면서 “지난해 2월 이그니오 현장을 취재했는데 당시 부지 기반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고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그니오가 해당 부지에서 시설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그니오 측이 건설을 중단하면서 해당 부지는 현대차 협력업체인 대창시트(DSC)가 대신 공급받았다. 본보 취재팀이 지난 17일 현장을 방문했을 당시 이그니오 제련소가 들어서기로 했던 부지에는 대창시트의 공장이 완공돼 내부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건설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8월 부지가 확정돼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그니오가 투자를 포기한 직후 곧바로 대창시트에 부지가 인계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 관계자는 “이그니오의 현지 투자는 고려아연에 인수되기 이전에 결정된 사안”이라며 “전자폐기물을 파쇄하는 기술이 세계 1위인 고려아연에 비해 떨어지고 환경 측면에서 탄소 배출까지 많아 불필요한 시설이라는 판단에 따라 조지아 주정부와 협의해 투자 철회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1000억 이상 비용을 들여 그 만큼의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투자 계획을 접었다는 설명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이그니오 지분을 5800억원대에 인수한 데 대해선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적정한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새로 공장을 짓는 것보다 현지 기업을 인수하는 게 투자비용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고 봤다”며 “딱 맞는 기업이 매물로 널려 있는 게 아니어서 이그니오의 네트워크와 물류망, 공장 등 전체적인 조건이 미국 시장 진입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고 지분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이그니오 자리에 대신 지어진 대창시트 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