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할리우드가 미쳤습니다”

이상연의 짧은 생각 제140호

 

“미쳤다, 미쳤어”

지난 9일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제인 폰다가 봉투를 열고 수상작을 발표하자 제 입에서 터져나온 말이었습니다. 애틀랜타 사람들에게는 CNN 창업자인 테드 터너의 부인으로 알려진 제인 폰다는 사실 아카데미상을 2차례나 받은 영화계의 전설입니다.

그녀는 봉투에서 꺼낸 수상작 명단을 잠시 응시하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Parasite”라고 나지막히 말했습니다. 순간 카메라는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가 얼싸안으며  환호하는 모습을 비췄고, 카메라가 잡은 또다른 명배우 캐시 베이츠의 입술은 분명히 “Oh, My God”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송강호가 봉 감독에게 한 말도 “아카데미가 미쳤다, 미쳤어”가 아닐까 상상해 봤습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국제영화상 수상 여부에 관심을 갖던 미국 언론들이 2주전부터는 작품상 수상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보도하더니, 1주일 전부터는 아예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해야 아카데미에도 좋다”는 식의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수상 직후 CNN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생충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다른 작품들이 따라올 수가 없었다”며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듯 보도했습니다.

영화팬이라면 이날 시상식장에 앉아있는 사람들, 특히 봉 감독과 함께 감독상 후보에 오른 감독들의 면면만 봐도 감탄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 가운데 한 명인 마틴 스코세이지, 31살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천재 쿠엔틴 타란티노, 34세때 감독 데뷔작인 ‘아메리칸 뷰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또다른 천재 샘 멘데스, R등급 코미디 최대 흥행작 ‘행오버’와 폭력과 페이소스를 버무린 사이코 스릴러 ‘조커’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재능을 발휘하는 토드 필립스를 모두 꺾고 감독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미 각본상까지 수상했기 때문에 “이러다 작품상까지 받겠다”는 예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하며 실망에 대비해  미리 감정에 예방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제인 폰다의 엷은 미소를 보고 순간적으로 “미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지난 91년간 한번도 외국어 영화에 문을 열지 않았던 콧대높은 영화왕국 할리우드가 한국 영화에 처음으로 허물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의 수상 이유는 무엇보다 영화 장인이  빚어낸 정교한 작품성이겠지만 작품상 수상 소감에 불쑥 나타난 이미경 CJ 부회장을 보면서 “역시 정치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 부회장은 할리우드에서 거의 유일하게 알아주는 한국 영화계의 큰 손입니다. 지금은 성추문으로 몰락한 하비 와인스타인이 그랬듯, 아카데미상 수상을 위해서는 영화담당기자 대상의 여론전과 투표권을 가진 아카데미 위원들과의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여론전에는 봉 감독의 개인적 역량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봉 감독의 감독상 수상소감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봉 감독의 진솔한 찬사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상을 받으면서 탈락한 경쟁자를, 그것도 세계적인 거장을 이 정도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요?. 봉 감독은 시상식을 앞두고 수백회의 인터뷰를 하면서도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BTS로 대표되는 K-팝 열풍으로 인해 미국내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수백배나 증가했습니다. 여기에 경제적인 파급력이 엄청난 종합예술인 영화 분야에서  한국영화 ‘기생충’은 미국, 아니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오랜만에 환호와 감격을 안겨준 봉준호 감독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대표기자